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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의 공간

아빠는 집에서 쉴 공간이 필요하다. 그러니 지금 더 준비(저축)하라.

by Eaglecs

초안 작성 2022. 3. 30. / 2024. 04. 12 보완


들어가는 글.


오늘의 이야기는 집에서 적절하게 머물 자리가 없는 가장(아빠)들과 나누고 싶은 글이다. 나만 혹은 내 주위만 그런지 모르겠는데 안방은 주로 아내가 사용한다. 물론 같이 사용해도 되지만 세월이 가면서 잠버릇도, 생활 방식과 리듬에도 차이가 있어서 자연스럽게 각자 방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것 같다. 나도 마찬가지이다.


아이가 있으면 또 하나의 방이 할당된다. 아이가 2명이면 자연히 더 이상 남은 방이 없게 된다. 일반적으로 방이 3개인 집에 산다는 가정에서 하는 말이다. 그러나 저출산의 시대이니 아이는 한 명으로 산정하자. 그러면 통상 방이 3개인 집엔 하나의 방이 남는데 그건 옷방이 되거나 가장을 위한 서재가 되기도 하고 간혹 방문하는 분들을 위한 손님방이 되기도 한다. 물론 물건이 많은 집에서는 창고로 쓰이기도 한다. 따라서 방이 3개인 집에서 그중 하나를 아빠의 공간으로 만들기가 쉽지만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이제 남는 공간은 거실과 부엌 그리고 화장실이다. 과거엔 베란다도 유용한 공간이었는데 이젠 거실 확장이 일반적이어서 베란다 공간을 얻기도 쉽지가 않게 되었다. 그래서 베란다는 남는 공간에서 제외한다. 이중 그나마 조용한 공간이 거실인데 이마저도 독립성이 떨어지는 공용 공간이기 때문에 자기만의 공간이 필요한 ‘아빠’에게 적절한 공간이 되기는 쉽지 않다. 단, 적절하지는 않더라도 부엌이나 화장실과 비교하여 월등히 경쟁력이 있는 공간이기는 하다.


그래서 나와 비슷한 환경에 있는 ‘아빠들’은 거실을 자주 사용한다. 그리고 집에 들어가도 머물 곳(?)이 마땅하지 않기 때문에 늦게 들어간다. 아닌가? 집에 늦게 들어가려는 핑계일 수 있다는 점은 인정한다. 아무튼 이런 경향이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나는 이 글을 그런 ‘아빠’들과 공감하는 기회로 삼고 싶다. 물론 안방을 잘 쓰고 계시는 ‘엄마’도 함께 초대한다. 다만, 이런 상황을 거론하는 것은 불평을 말하기 위함이 절대 아니다. 변화된 환경을 기술하는 것뿐이다. 상황과 환경이 변했으면 거기에 적응하거나 개선할 방법을 찾으면 된다. 모든 이와 같은 상황에 처한 ‘아빠들’이여. 좋은 방법을 찾기 바란다. 난 찾았다.





본 문



내가 거주하는 아파트 거실의 한 가운데, 넓게 전기 장판을 깔아 놨다. 그 위에 이불을 반을 접어서 가지런히 깔아 놨다. 그리고 전기 장판의 열 손실을 줄이기 위하여 전기 장판 밑에는 얇은 담요도 깔아 놨다. 이렇게 아파트 거실 한 가운데 나의 이부자리가 놓여있다. 안락함에서는 침대와는 비교도 할 수 없고, 담요와 비교해도 상당히 딱딱한 그 거실 바닥에서 난 매일 잠에 든다. 동정심이 드는가? 그럴 필요 없다. 다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견딜만 하기도 하고. 난 ‘아빠’니까 말이다.


나의 아내는 TV를 새벽까지 보는 습관이 있다. 드라마를 즐기기도 하고 밤 잠이 적기 때문에 그런 습관이 붙은 것이다. 불만은 아니다. 그냥 그렇다는 것이다. TV는 보라고 사놓은 것이니까. 물론 내가 평균적으로 매우 빠른 시간 안에 잠이 들기 때문에 TV를 켜 놔도 내가 잠을 드는데 아주 많이 힘이 드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날이 갈수록 그 TV 소리가 아무리 작아도 내 신경을 거슬리게 한다. 그래서 잠이 안 오고, 그런 상태에서 10분이고 20분이고 뒤척이다 보면 슬슬 '아주 조금' 짜증이 나기도 한다.


그래서 거실로 이동한 것이다.


이어폰을 끼고 TV 소리를 막아 보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틀어 놓으면 결국 그것도 잠이 들려는 사람에게는 일종의 소음이기 때문에 내 잠듦을 방해한다. 이불을 머리 끝까지 덮어 쓰고 귀를 막아도 뭔가 계속 나를 거슬리게 하는 것이 있는 느낌이다.


그래서 거실로 나왔다.


그리고 내가 코를 꽤 곤다고 한다. 난 듣지 못하기 때문에 알 수 없지만 아내가 꽤 오랜 기간 동안 관찰하였고 그 소음에 불편함을 느꼈다고 하니 내가 코를 꽤 고는 것이 맞는 것 같다.


그래서 거실로 나왔다.


한 겨울의 거실은 춥다. 난방을 제대로 할 경우엔 꽤 많은 비용이 추가되기 때문에 매우 추운 한 겨울에도 사실 별로 난방을 하지 않았다. 두꺼운 윗옷(후리스) 그리고 파자마를 입고 간혹 양말도 신고 잠을 자곤 했다. 거실 난방을 켜면 그래도 꽤 어렵지 않게 추위를 극복하면서 잠을 잘 수 있겠지만, 에너지 비용도 많이 오르고 또 한 사람만을 위하여 너무 넓은 공간을 데우기에는 그 비용이 좀 과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 비용 대신 옷을 껴입고 자는 선택을 한 것이다. 어차피 새벽 4시~5시면 일어나서 나가는데 불과 6~7시간동안 거실이라는 큰 공간을 데우기 위하여 난방을 자주 하는 것은 내게 적절한 선택이 되기 어려웠다. 좀 심한 생각일 수도 있는데, 내가 나간 후에는 누구도 이용하지 못하는 거실에서 밤새 불을 지핀 덕에 데워진 잔열이 그 누구의 따듯함에도 기여하지 못하고 흩어져 버릴 것을 생각하면 그저 아까운 생각이 먼저 들었다. 좋게 말하면 알뜰한 것이고 그 반대로 말하면 쪼잔한 것이겠다. 난 그렇게 쪼잔한 모양이다.


작년까지만 해도 그렇게 버텼는데, 한 살 더 나이를 먹고 요사이 코로나로 감기도 위험하기 때문에 날이 아주 추운 경우엔 난방을 켜고 잠을 잤다. 난방을 켜니 좀 더 잘만하다. 역시 돈이 좋다. 뭔가 투입이 되면 결과가 나온다. 그리고 그 반대급부도 있다. 내 마음이 불편하다. 내게 에너지 비용의 증가를 부담할 능력이 없는 것이 아니다. 그냥 그렇게 너무 따듯하게 생활하는 것은 몸에 맞지도 않고 이상하다는 생각이 더 크다. 워낙 어려서 주택에서 오래 살았고 그 주택이 외풍이 매우 심하여 내가 사용하는 방 안에서 얼음이 얼 정도였다. 옛날 양옥이었지만 보일러 공사를 제대로 하지 못하여 연탄 보일러를 가동하여도 방이 별로 따듯하지 않았었다. 그래서 두꺼운 솜 이불을 덮었는데 아무리 그걸 오래 덮고 있어도 온기를 유지하기가 어려웠다. 옛날 솜 이불은 또 왜 그렇게 무거운지. 엄청난 솜 이불의 무게감에 짓눌린 상태로 미지근한 바닥에서 올라오는 미열을 2차 방어막으로 하면서 그 추운 겨울 날들을 보냈었다.


그 주택의 내 방 책상에 앉으면 더 추웠다. 그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컵속의 물은 전날 올려다 놓은 물이라면 다음날 아침이면 꽁꽁 얼어 있었다. 그냥 언 것이 아니다. 꽁꽁 물 전체가 얼었다는 것이다. 내 방의 창가 부근의 온도 자체가 영하였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80년대는 요즘 보다 좀 더 춥지 않았던가? 그렇게 집안 전체의 난방은 엉망이고, 집은 오래되어 창문틀이 뒤틀려서 찬 바람이 자유롭게 오갈 틈새가 여기 저기 있었고, 벽체 또한 견고하지 못하여 외기를 그대로 빨아들여서 방안으로 공급해 주는 역할을 하는 듯 했다. 그나마 방안에서 밖으로 빨려나가지 않고 버티려는 미미한 온기마저 기압차이로 인하여 방 외부로 술술 통하는 그 틈새로 끌려 나가 버리기 일수였다. 환기가 참 잘 된 점은 긍정적으로 봐야하겠다.


따라서 실내이긴 해도 입김은 기본으로 나왔다. 그런 곳에서 대학 3학년까지 생활했다. 요즘은 상상할 수 없는 상황인데 80년대라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드라마 응팔에 나오는 그런 집들 중에서 난방에 특히 취약한 집으로 생각하면 된다. 그래서 겨울이 ‘실내일지라도’ 추운 것은 당연하며, 너무 따듯한 것은 매우 이상하고, 그래서 그 이상한 환경을 만드는 너무 높은 실내 온도는 온전히 비용의 낭비라는 생각과 더불어 왠지 적응하기 힘든 기괴한 느낌을 내게 주고 있는 것이다.


반면 아내가 사용하는 안방은 내게는 늘 열대 지방이다. 난방을 켜고, 침대 위에는 온수 매트도 깔고 2차 난방을 한다. 올라가 보면 따듯하다. 맞다. 그래서 몸이 풀리곤 한다. 그런데 마음은 답답하다. 내 영혼도 답답함을 느낀다. 그래서 정말 몸이 아프거나 하지 않는 이상 난방을 켜지 않는 것이 습관이 된 것이고 내 사상이 된 것이다. TV나 생활 습관도 문제지만 너무 더워서 그 방에 있기가 쉽지도 않았다.


그렇게 난 안방을 떠나서 거실로 나왔다.


그래서 위에 이야기한 대로 날 바닥에 거의 쿠션이 없는 얇은 요와 전기 장판 위에 이불만 사용하여 잠을 자는 것이다. 이런 삶을 사는 사람들이 나 말고도 더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유는 제 각각이겠지만 말이다. 좀 짠한 생각이 들기도 하고 어리석다는 생각도 들지만, 그래도 난 그게 마음이 편하다. 그래서 그렇게 겨울을 나고 있고, 그렇게 거실에서 삶의 상당 부분을 보내고 있다.


지금까지 난 53년하고도 4개월을 살고 있다. 내가 지금까지 겪어온 많은 일들이 있지만 이런 거실에서의 삶은 왠지 모르는 자유와 동시에 외로움을 느끼게 한다. 나의 삶의 목표가, 나의 삶의 목적지가 거실은 아닐텐데 현재 내가 휴식을 제일 많이 취하는 곳, 제일 편하게 여기는 장소가 거실이 되어 버렸다. 아무튼 그렇게 난 내가 편안하게 여기는 현실적 공간을 '손에 넣었다'. 아무도 가지려고 하지 않는 공간을 차지한 것이기 때문에 손에 넣었다기 보다 그 곳을 할당받았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하리라.


가족간의 정이 돈독해지고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이야기가 꽃피는 거실은 세상에 별로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어딘가 있긴 있고, 꽤 많이 있을 수도 있지만, 내겐 아직 없다. 거실은 나의 Self 유배 공간이다. 극성이 다른 사람들이 만나서 계속 서로를 피해다니는 것 처럼 난 거실로 밀려났다. 아마도 얼마 후, 어쩌면 1~2년 후에 퇴직을 하면 나의 공간은 새로이 마련되어야 할 것 같다. 지금처럼 거실에서 난민 생활을 하는 것은 보기에도 좋지 않고 왠지 많이 우울해 보인다. 지금은 아무 생각도 없이 그냥 지내고 있지만, 내 날개가 꺽이거나 스스로 꺽은 이후에는 그렇게 지내서는 안될 것 같다. (글을 보완하는 24년 4월 현재 난 날개가 꺽였다).


어딘지 알 수 없지만, 난 나의 공간을 마련할 것 같다. 월세든, 전세든. 내가 있을 공간. 내가 주인이 되고 내 성향에 맞게 운용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할 것이고 그렇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의 공간은 나의 아내와 나의 딸의 공간이다. 둘은 동의하지 않을 것이지만, 아무튼 내 입장에선 그렇다는 말이다. 그래서 내 공간을 마련하는 것이 나의 꿈 중의 하나가 되었다. 그 꿈은 당연히 실현될 것이다. 내가 그것을 실현할 분명한 의지가 있기 때문이다. 어디에서 어느 정도의 공간을 준비할 지는 알 수 없지만 반드시 준비가 될 것이다. 그 공간 속에서 내 삶의 고개를 다시 넘어 서고 싶다. 지금 내가 속해있고 내가 소모 당하고 있는 조직에서의 한 막을 끝내고 새로운 나만을 위한 막을 열 것이다. 생각만 해도 좋다.


그러나 난 오늘도 거실에서 자야 한다. 딱딱하고 따듯하지 않은 곳에서. 외롭게. 어쩌면 내가 외롭다는 생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머리 속이 텅 빈 상태에서 잘 것이다. 아마도 꽤 피곤하니 그리고 꽤 조용한 공간이니 곧 꿈의 세계로 빠져 들겠지.


들어가는 글에서 ‘난 방법을 찾았다’ 라고 이야기 했었다. 이걸 밝히고 오늘의 글을 마친다. 방 4개짜리 아파트를 얻었다. 듣고 보니 어이없고 허무한가? 사실 이게 가장 빠르고 현실적인 방법이었을 뿐이고 내게 기회가 왔을 뿐이다. 비 현실적이고 아무나 할 수 없는 방법이기 때문에 이걸 방법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억지라는 생각이 드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꼭 그렇지 만은 않다. 계산기 잘 두드려 보면 거주비를 크게 상승시키지 않고 방 3개에서 방 4개짜리 아파트로 이사 갈 방법이 없지는 않다. 찾으면 보인다. 잘 안보인다고? 그럼 아래 나오는 글까지 참고하기 바란다.






나오는 글...


그동안 이 부분을 쓰면서 ‘요약과 감상’ 이라는 제목을 달았었다. 이 글부터는 ‘나오는 글’ 이라고 바꿨다. 이게 앞 뒤가 좀 더 맞는 느낌이 들었다.


본격적인 나오는 글을 써보자.


인간에게는 사회적 공간도 필요하고 거리도 필요하다. 사적인 공간도 필요하며 특히 집에서 쉬고 생각할 수 있는 나만의 공간이 필요하다. 아내에게도 아이에게도 필요하듯이 아빠에게도 필요하다.


내가 방법으로 제시한 ‘방을 늘려서 이사 가는 것’은 쉽지 않다. 확장하지 않은 구축이라면 베란다를 이용하든 아니면 거실 한 켠을 구획하여 이용하건 어떤 식으로든 아빠의 공간을 만들라. 애들이 많아서 지금은 안된다고? 그럼 나중에라도 만들라. 그 나중 혹은 그 시점을 결정하는데 가장 큰 역할을 차지하는 사람이 바로 ‘아빠’ 자신임을 잊지 말라.


무슨 말이냐고? 아빠의 공간을 만들기 위하여 집을 늘려서 가려면 재정적 준비가 필요하다. 그래서 어제 내가 ‘욕망의 ETF’라는 글을 통하여 밑밥을 깔았다. 거기에 써 놨다. 저축을 가능한 일찍 시작하라고. 이 글을 읽는 분 중에서 현직인 분들은 나보다 젊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마약 40대라면 나보다 10년에서 15년 이상 젊은 것이다. 그러면 자신의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서 필요한 재정적 준비를 할 시간이 꽤 남아 있다. 40대 때만 해도 ‘아빠’의 공간이 없어도 좀 덜 불편하고 견딜만 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서재 ’라는 이름의 나만의 공간이 아쉬워질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러니 지금부터라도 준비하여 그때를 대비하기 바란다. 5년 정도 준비하여 나의 공간, 내가 자유롭게 사용할 공간이 생긴다면 한 번 해볼만 하지 않을까?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도저히 안될 것 같은가? 그럼 차선이 있다.


그래서 거실이 있는 것이다. 여기에 만족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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