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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aglecs Jul 05. 2024

진정한 사랑





 어제 경기도 군포에 있는 처가집에 다녀왔다. 당신의 큰 딸이 수술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으신 장모님이 기어이 오시겠다는 고집을 부리셔서 모시러 간 것이다. 올해로 연세가 팔십이신데 여전히 대중 교통을 이용하여 충분히 오갈 수 있을 정도로 정정하긴 하시지만 내 눈에는 군포에서 인천 검단까지의 대중 교통을 이용한 이동은 장모님께 너무 힘든 고행길로만 보여서 도저히 그냥 있을 수가 없었다. 힘겹게 발걸음을 옮기다가 실수로 낙상이라도 하면 정말 큰일이기 때문이다. 거의 두 시간은 전철과 버스를 갈아타고 이동해야 하는 길이라서 결코 팔십 노인에게는 쉬운 일이 아니다. 아직 60도 되지 않은 나도 2시간의 대중 교통이용이 불편하고 힘이 든데 80노인에게는 말할 필요도 없이 고된 길일 수 밖에 없다. 


 대중 교통을 타 보면 팔십줄의 어르신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그런데 내 눈엔 역시 그분들의 모습은 하나같이 힘겨워 보이기만 했다. 경제적 여건과 상관없이 팔십에 이르면 차를 직접 운전하기도 쉽지 않고 그렇다고 대중 교통을 이용하기도 녹록치 않으니 여간 불편한 상황이 아닐 것이다. 노령화가 가속화되고 평균 수명이 증가하면서 팔십 혹은 그 이상의 어르신들은 갈수록 증가할 것이다. 그런 분들은 나와 가까운 가족일 수도 있고 나의 지인의 지인일 수도 있다. 우리가 좁은 땅덩어리에서 오밀 조밀 모여살고 있기 때문에 길가에서 마주치는 노인은 거의 대부분 몇 다리만 건너면 어떤 식으로든 연결이 되는 관계일지도 모른다. 전혀 모르는 어르신에게도 처신을 잘 해야 할 이유일지도 모른다. 우리 나라가 더 잘 살게 되면서 노인에 대한 배려가 많이 좋아지고 있는 것은 그나마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다.   


사오년 전까지만 해도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는데 어느 시점에서부터인가 더욱 노쇠해져가는 장모님의 모습이 눈에 두드러지게 띄어서 우리집에 오고 싶어 하시면 이렇게 직접 차를 몰고 모시러 가곤 했다. 약 44km로 거리가 멀지도 않고 차가 막혀도 1시간 20분이면 도착할 수 있기 때문에 장모님이 안전하게 도착하시기를 노심초사(勞心焦思)하며 기다리기 보다는 직접 다녀오는 편이 훨씬 마음이 편하기 때문이다. 저층 아파트의 일층인 장모님댁을 나서서 내가 주차해 놓은 차로 걸어 오시는 길에 약 십여개 정도의 계단을 내려와야 하는데 고작 그 짧은 계단을 내려오는 모습마저 힘겨워하시는 모습을 보면 많은 생각이 떠오르게 된다. 


 26년전 처음 인사를 드리기 위해서 만났을 때의 모습도 기억에 명료하게 남아있다. 지금부터 26년전이면 지금의 나보다도 2살이나 젊으실 때이다. 54세의 그야말로 한창 젊은 모습이셨던 것이다. 물론 만 29세에 불과했던 내 눈에 비친 장모님의 모습은 나이가 지긋하게 드신 중년의 모습이었지만 실제로 당시 장모님은 젊디 젊은 시절을 보내고 계셨던 것이다. 외모도 물론 매우 아름다우셨었다. 세월은 그 후로 26년이 흘렀고 생기 넘치고 피부도 비교적 팽팽하셨던 그 모습은 거의 다 없어져 버렸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피할 수 없는 이러한 변화에 대하여 서운함과 서글픔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동시에 온갓 것의 무상(無常)함을 겸허하게 다시 생각하게 된다. 덧없음 말이다.   


 덧없음은 단순히 '의미없음'을 뜻하지는 않는다. 덧없음은 모든 것이 일정하지 않고 변한다는 진리를 의미한다. 인간은 세월의 무상함을 피할 수 없다. 피하려고 그 어떤 노력을 해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좋은 약을 먹고, 식이 요법을 하고, 엄청난 시간을 들여서 꾸준히 운동을 하면서 몸의 외형이 무너지는 것을 오래 지연시키는 것은 가능하지만 결코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세월의 거센 흐름은 멈출 수 없다. 이렇게 멈출 수 없는 것이 진리이긴 하지만 몸의 외형을 견고하게 유지하기 위하여 다양한 노력을 하는 것은 물론 매우 좋은 것이다.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깃들수 있기 때문에 나이가 들더라도 꾸준히 관리하는 것은 덧없고 무상한 삶을 좀 더 유익하게 즐길 수 있는 기회를 주니 말이다. 


 세월이 26년이 지나서 내 장모님의 육체는 가파르게 무너져 내리고 있다. 특히 최근 몇 년 동안 급격히 무너져 내리고 있어서 그 모습을 지켜보는 나도 마음이 복잡해지곤 한다. '주름진' 이라고 표기하기에는 부족할 만큼 엄청나게 크고 작은 굴곡이 패인 얼굴로 변하셨고, 눈동자는 갈수록 흐려지고 있다. 걷는 속도는 해가 갈수록 느려지고 있다. 양말이나 신발을 신을 때도 참을 기다려 드려야 한다. 발음이 분명하게 되지 않아서 무슨 말씀을 하실때 귀를 쫑긋 세우지 않으면 제대로 이해하기가 어려운 경우가 많다. 시력이 떨어지셨고 몸의 동작도 불편하시기 때문에 모처럼 우리집에 와서 딸에게 음식을 주시려고 이런 저런 양념이나 음식 재료를 찾으려고 하시는데 결국 제대로 찾지 못하고 계속 나를 부르시기도 했다. 청양 고추가 있나? 간장은 어디에 있나? 쌀은 어디에 있나? 유일하게 사지가 멀쩡한 내게 연이어 질문을 쏟아 내셨다. 오십이 넘은 딸이지만 당신에게는 없이 작고 여리고 귀한 딸일 밖에 없는데 딸이 지금 아프지 않은가? 뭐라도 주고 싶은 마음은 굳이 헤아리려고 하지 않아도 너무도 맑게 보였다. 


 세월의 흐름과 함께 육체는 힘을 대부분 잃었지만 자식에 대한 사랑은 결코 한 치도 줄어들지 않은 것이다. 세월이 무상하고 덧없다는 것은 너무도 자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사랑 마저도 시간이 지나면 변하기도 한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은 무상하지도 덧없지도 않고 변하지도 않는다. 진정한 사랑은 모든 것을 주고 희생하고 이해하는 것이다. 조건이 없는 무조건의 사랑만이 진정한 사랑이다. 사랑이 변했다면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다. 당신의 사랑이 변한 적이 있다면 미안하지만 그건 진정한 사랑이 아니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진정한 사랑은 산삼보다도 백배는 찾기 어렵다. 특히 타인과의 관계에서는 더 희귀하다. 존중과 존경 그리고 배려와 인정같은 것이 간혹 사랑으로 오해되는 경우가 있다. 내가 타인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것도 매우 좋은 것이지만 결코 그것을 진정한 사랑이라고 포장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러나 다른 사랑은 몰라도 적어도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은 진정한 사랑인 경우가 거의 대부분인 것 같다. 물론 부모가 자식을 학대하는 경우도 있기는 하지만 일반적으로 일어나는 일은 아니다. 대부분의 부모는 자기 자식을 끔찍하게 여긴다. 그리고 자식을 위해서는 모든 것을 내 놓으려고 한다. 팔십의 노구를 이끌고 힘들게 길을 오셔서 도착하자 마자 자식에게 먹일 음식을 준비하는 장모님의 모습은 그래서 내 눈에는 진정한 사랑으로 크게 빛을 내 뿜고 있었다. 어투가 부드러운 편이 아니고 약간 투덜대시는 편이긴 하지만 그래도 당신의 딸에 대한 진정한 사랑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장모님은 오늘 하루만에 다시 댁으로 돌아가시겠다고 한다. 내가 다시 모셔드리려고 하는데 완강하게 거부를 하고 계시고 있어서 난감한 상황이다. 이전에 수시로 다니던 길인데 왜 자꾸 그러냐? 나도 충분히 다니고도 남으니 걱정을 붙들어 매라는 말씀을 단호하게 하시면서 사위의 '픽업 서비스' 거부하고 계시는 중이다. 너무 강경하게 나오셔서 일단 근처의 지하철 역까지만 모셔다 드리기로 합의를 하긴 했지만 계속 찜찜한 느낌이다. 사실 팔십의 노구이시긴 하지만 요즘에도 서울로 친구분들을 만나러 대중교통을 통하여 나들이를 가시곤 하기 때문에 거의 문제 없이 댁에 안전하게 도착할 것으로 생각은 된다. 아무래도 내가 쓸데 없는 걱정이 너무 많은 모양이다. 아무튼 장모님의 변함없는 진정한 사랑이 앞으로도 한동안 계속되길 바랄 뿐이다. 아내에게 내가 도저히 해 줄 수 없는 것을 해 줄 수 있는 지구상에 유일한 분이기 때문이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백세까지만 버텨 주시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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