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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옹기종기 May 09. 2023

어느날 갑자기 예산이 교부됐다

신규 공무원 시절의 트라우마

 2020년 중순쯤, 코로나19 바이러스가 한창 퍼지기 시작했을 무렵이다.


 당시 코로나19 확진으로 인해 일자리를 잃으신 분들을 위해 갑작스럽게 조성된 지원 예산이 중앙 정부를 통해 각 지자체로 교부 되었다.


 단순 지원금이 아니라 각 지자체가 해당 지원금을 사용해 코로나로 인해 생계가 어려워지신 분들을 고용하고, 그 노동의 대가로 어려우신 분들의 근로 의욕도 고취시키고 생활에 도움이 될 수 있게 하라는 취지의 지원 예산이었다.


 정확한 기억이 나진 않지만, 우리 지자체에도 꽤나 많은 예산이 할당 되었던 것 같다.


 아무튼 해당 예산을 쓰기 위해 일자리과의 주도 하에 각 부서별로 당장 있지도 않은 사업을 만들어내야하는 상황이었다.


 우리 부서에도 약 50여 명의 할당량이 떨어졌다.


 그리고 그 예산을 사용하기 위해 새로운 사업을 만들어내야 하는 우리 부서의 담당자로 내가 결정됐다.


 주무팀의 다른 팀원들에 비해 내 업무분장이 널널해 보인다는 게 주된 이유였다.


 당시 우리 과는 몇몇 사업을 진행하긴 했지만, 단순 민원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분류 상 '민원 부서'에 해당하는 부서였다.


 딱히 새로운 사업을 만들만한 거리가 없었다.


 기존 공무직분들의 일손이라도 돕기 위해 단순 작업을 하는 사업을 만들어 제출해볼까도 했지만, 곧이어 기다렸다는 듯이 기존 인력을 돕는 단순 작업식으로 예산을 사용해서는 안된다는 공문이 연달아 내려왔다.


 반드시 해당 예산으로 전에 없던 새로운 사업을 만들어 제출해야만 했다.


 머리를 싸맨 결과, 내가 내놓은 결론은 우리 부서와 관련된 캠페인 홍보물을 동네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나눠주는 일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근로자분들이 배정 됐고, 그분들에게 조악하게 프린트 된 홍보물을 쇼핑백에 담아 나눠드렸다.


 필요에 의하지 않고, 갑작스럽게 결정된 사업이었기에 사업의 목적도, 방향도, 체계도 제대로 된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근로자분들은 도대체 왜 하는거지라는 표정으로 하루 종일 사람들을 붙잡고 홍보물을 나눠줬다.


 나는 아직도 그분들이 한여름에 땀을 뻘뻘 흘리며 관심도 없는 주민들에게 홍보물을 나눠주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도 가끔 지하철역 주변을 지나다 해당 지자체의 이름이 쓰인 어깨띠를 메고 무료한 표정으로 서성거리는 근로자분들을 보면 그때의 기억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게 된다.


 지자체 공무원으로 근무하다보면 저때의 나처럼 예정에 없이 갑작스럽게 조성된 예산을 교부 받아 빠른 시일 내에 사용해야 하는 상황을 종종 겪게 된다.


 각자의 사정이 있겠지만, 기존의 업무는 그대로 유지한 채, 예고조차 없던 상황을 맞이해야 하는 지자체 공무원들 입장에서는 참으로 난처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당시 나는 워낙 경험도 없고 능력도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더더욱 업무 처리에 능숙하지 못했겠지만, 누가 그 일을 맡아 했더라도 그때의 나보다 더 효과적으로, 더 취지에 맞게 그 예산을 사용했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50명짜리 신규 사업을 갑작스레 만들어야 한다는 팀장의 말에 모두들 굳은 표정으로 천장만 바라보던 팀원들의 얼굴이 아직도 눈앞에 생생하다.


 앞으로 내가 공무원 생활을 해나가면서 코로나 19와 같은 특이 상황을 몇 번이나 겪게 될진 모르겠지만, 적어도 다시는 그때와 같은 상황을 맞이 하고 싶지는 않다.


 신규 시절 생긴 트라우마는 공무원 생활에 한 번으로 족하다.


 그때 내 요청에 의해 여기저기 버스를 타고 돌아다니며 아무 의미 없는 홍보물을 나눠주시던 근로자분들의 2020년 여름이 지울 수 없는 불쾌한 기억으로 남아 있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래본다.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D


 * 배경 출처: 영화 <아이 캔 스피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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