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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옹기종기 Jun 02. 2023

공무원의 꽃, 서무를 아시나요

서무를 해봐야 공무원 조직을 알 수 있다

 공무원 조직엔 서무라는 자리가 있다. 말 그대로 잡다한 일들을 모아 처리하는 자리다.


 부서와 관련한 자료를 취합해서 상부에 제출하고 또 상부에서 내려온 전달사항을 과장을 비롯한 여러 직원들에게 안내한다.


 이외에도 회계, 예산, 복무, 보안, 교육, 비상근무 등등의 일을 도맡아 한다.


 내가 구청을 그만두기 전, 같이 일했던 10년차 7급 주무관님 한 분께서는 서무라는 자리에 대해 정확히 이렇게 표현했었다.


 "난 차라리 하루종일 진상 민원한테 욕들어 가면서 단속이나 과태료 업무를 하지, 죽는 한이 있어도 서무는 다시 안 해. 지금 부서에서 서무 하라고 했으면 나 휴직 들어갈라고 그랬어."


 대체 그 주무관님은 서무에 대해 평소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셨길래 저렇게까지 이야기하셨던 것일까.


 사실 서무 자리는 적재적소에 인재가 배치되어 조직이 '제대로'만 돌아갈 수 있다면 실제로는 딱히 할 일이 없는 자리다.


 내야할 자료가 상위기관으로부터 내려온다. 부서원들에게 작성 양식을 뿌린다. 부서원들이 각자 맡은 부분에 대해 자료를 제출한다. 자료를 취합하고 취합된 자료를 팀장, 과장에게 검토 받는다. 미흡한 부분에 대해서 과장이 각 팀 담당자들과 다이렉트로 상의한다. 그렇게 최종 결과물이 나오면, 최종본을 상위기관에 제출한다.


 만약 일선 담당자부터 과장까지 각 구성원들이 자신들의 맡은 바를 완벽히 수행한다면 서무가 해야할 일 위에 나열한 게 전부다. 딱히 판단을 내리거나 자료를 만들어낼 필요가 없다. 그냥 제출된 자료를 양식에 맞게 잘 취합하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서무의 비극'은 부서의 각 구성원들이 자신들의 역할을 100% 수행하지 못할 때부터 발생한다.


 예를 들면 이런식이다.


 담당자는 자신의 업무를 잘 모른다. 업무를 모르니 자료를 제출하라고 하면 짜증부터 낸다. 자료는 들어오지 않고 '긴급!!'을 남발하는 상위기관의 자료 제출 기한 역시 너무나도 촉박하다.


 미흡하게 제출된 자료를 겨우겨우 모아 부족한 부분은 문서대장을 뒤져서 채워 넣고 과장에게 검토를 부탁하면 과장은 담당자가 누군지 뻔히 아는 부분인데도 불구하고 서무에게 자료가 이게 뭐냐며 버럭 화를 낸다. 담당자가 놓친 부분을 서무가 잡아주고 채워주는 게 서무의 역할이라고 일장 연설을 늘어놓는다.


 머리를 조아리고 다시 담당자에게 가 미흡한 부분을 채워줄 것을 요청하니 자기가 그런 것까지 해야 하냐고 역시 또 버럭 화를 낸다.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오른다. 성질 한번 제대로 부리고 다 뒤집어 놓고 싶지만 자료 취합이니 비상 근무니 부서원들의 협조를 받아야 할 건들이 너무나도 많다.


 심호흡을 하고 다시 담당자에게 웃는 얼굴로 자료 제출을 요청한다. 담당자는 대단한 호의를 베푸는마냥 온갖 생색을 내며 '약간 덜 미흡한' 자료를 던지듯 메신저로 전송한다. 그렇게 겨우겨우 결재 받은 자료를 상위기관에 공문으로 전송하니, 몇 시간도 되지 않아 또 다른 부서에서 '긴급!!!!!!'을 제목 앞에 붙인 또다른 자료 제출 요청이 내려온다.


 온몸에 힘이 쭉- 빠져 나간다.


 앞서 나열한 사례에서도 언뜻 짐작 되지만, 서무가 힘든 것은 결국 '사람' 때문이다. 자신의 사업만 묵묵히 하면 되는 일반 직원들과 다르게 서무는 과장부터 막내 직원까지, 수십 명의 사람들과 매일같이 커뮤니케이션을 해야한다.


 정상적이지 않은 사고를 가진 사람들과의 관계 형성을 하는 데 별다른 어려움을 겪지 않고, 아무리 부조리한 소리를 들어도 웃으며 넘길 수 있는 사람이라면 서무 업무에 전혀 어려움을 느끼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내가 지금까지 함께 일하며 지내온 사람들 중에서는 단 한 명도 그런 사람이 없었다.


 모두가 서무할 생각이 없냐는 질문에 서무는 공무원 경력 중 한 번으로 충분하다며 절레절레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10명 남짓한 적은 부서원에, 일 잘하는 과장과 주무팀장이 있는 부서가 아닌 이상, 서무는 언제나 외롭고 고달프고 억울할 수밖에 없는 자리다.


 가끔 편한 곳에서만 서무를 해봤거나, 서무 업무를 안해보고 경력을 쌓으신 분들이 서무 업무를 얕잡아보면서 "고유 업무도 없는데 그게 뭐가 힘들어?"라고 별 생각없이 얘기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이는 정말 뭘 모르고 하는 이야기다.


 보이는 게 다가 아니다. 직접 안해봤으면 함부로 이야기하지 마라. 서무만큼 부서에 따라, 경력에 따라,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 따라, 업무 난이도가 널뛰는 자리도 없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내가 서무를 하다가 일을 그만둬서 그런지 다른 공무원분들보다도 힘든 부서에서 서무 역할을 하며 고통받는 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남일 같지 않아 참 마음이 아프다.


 일에 치여 사람에 치여 힘든 분들은 정말 힘들겠지만, 아무튼 저연차 때 서무를 한 번은 해봐야 조직이 돌아가는 원리를 알고 또 그에 따른 업무능력을 키울 수가 있는 것 역시 분명한 사실이다.


 '서무를 한번쯤은 해봐야 공직 사회가 어떤 곳인지 명확히 알 수 있다.'


 여러분은 지금 누구보다도 빠르게 공직 생활에 대해 배워가고 있는 중이다. 너무 억울하게 생각하지는 말자. 여러분에게도 곧 좋은 날이 올테니깐 말이다.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D


 * 배경 출처: 영화 <아이캔스피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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