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시 현곡면 오류리 등나무

단편소설

by 이현기

“여러분은 등나무 전설이라고 들어보셨습니까?”


50년 개교 역사를 왜곡하지 않고 그대로 물려받은 탓에 날로 낡아 가고 있는 인문대학교의 현관 앞. 정갈하게 피어있는 등나무꽃은 오랜 역사를 지닌 가게가 주력 메뉴로 내세우는 대표 계절 음식과 같이 대학교의 오랜 역사와 동행했다. 등나무 아래엔 고풍스러운 벤치가 너덧 개 놓여 있었다. 주로 연인 관계를 바라거나 유지하는 암수 한 쌍의 학생들은 등나무꽃이 주는 황홀한 분위기를 본인들의 애정 전선 맑음을 위해 노련하게 활용했다. 전날 꿈이 좋았다거나 우연히 펼쳐 본 잡지 속 운세 코너에서 ‘오늘의 운세’가 좋다는 걸 발견해야 겨우 등나무꽃 아래 벤치를 점유할 수 있는 미신 같은 확률이 있었기에, 인문대학교 앞을 들락거리다 비어 있는 벤치를 발견한 날이면 탐욕의 풍선을 더욱 부풀리기 위해 복권을 사러 가는 친구들도 간혹 있었다. 그들의 복권 적중 내역을 일일이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간혹 5,000원어치를 사놓고 5,000원이 당첨되었다고 조삼모사 원숭이처럼 떠들어대며 자랑하는 녀석들도 있었다.


그렇게 등나무꽃은 마을 어귀에 놓인 장승처럼, 토템처럼 신묘한 기운을 사람들에게 내뿜고 있었다. 고지식해 보이는 검은색 뿔테 안경을 지그시 눌러쓰고 오후의 하품처럼 지루하게 고전문학사 강의를 하던 백발의 교수는 잠시 강의를 멈추고 창밖을 응시하다가 등나무꽃이 피어있는 벤치에서 시선을 멈췄다. 백발의 교수는 강의가 따분해지려는 찰나를 안경 너머로 날카롭게 낚아챘다. 교수의 입에서 깜짝 이벤트처럼 등장한 등나무 전설은 딱딱한 전공 서적에 수록된 내용이 아니었기에 몇몇 감성 풍부한 여학생들은 밀려오는 졸음을 일시 정지시킨 뒤 귀를 쫑긋 세우며 교수를 향해 호기심 어린 시선을 못 박기 시작했다. 학생의 이목을 어느 정도 끈 교수는 마른침을 한 번 꿀꺽 삼키고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꺼냈다.


“국문학도라면 봄의 화사함을 연등처럼 더욱 밝혀주는 저 등나무꽃을 보며 비밀스러운 문학적 영감을 떠올려야 하겠지요. 대중들에게 많이 알려진 이야기는 아니지만 사실 저 등나무꽃에는 아주 가슴 아픈 전설이 있답니다. 신라시대 경주의 한 마을엔 마음씨 곱고 예쁘기로 소문난 두 자매가 살고 있었는데…….”


백발의 교수님이 들려주는 긴 서사를 요약하면 대략 이러했다. 두 자매는 각각 은밀하게 한 남자를 좋아했다. 그 남자는 전쟁에 나가게 되었다. 두 자매는 남자가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슬픔을 못 이겨 연못가에 함께 뛰어들어 두 그루의 등나무가 되었다. 죽은 줄만 알았던 남자가 돌아왔다. 자매의 사연을 알게 된 남자도 연못에 뛰어들어 죽었다. 그 남자는 등나무 곁에서 팽나무가 되었다. 두 그루의 등나무는 팽나무를 휘감고 얽히어 봄이면 향기로운 등나무꽃을 피운다.


세 명의 꽃다운 청춘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안타깝고 가슴 절절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요즘 감성과는 전혀 맞지 않는 이야기였다. 남녀 서로가 진심으로 사랑을 나눈 것도 아니고 소위 말하는 두 여인이 한 남자를 각자의 일방통행으로 연모한 건데 남자가 죽었다고 서로 부둥켜안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는 사건이 상식적으로 전혀 와닿지 않았다. 남자도 마찬가지다. 지옥 같은 전장에서 귀한 목숨을 겨우 부지해 고향으로 기껏 돌아와 놓고 일면식도 없는 자매를 따라 죽었다. 아버지, 어머니한테 불효자라는 평생의 상처를 깊게 남겨 놓은 채. 뭐, 전설은 전설일 뿐이고 전승되면서 과장과 극적인 장치가 수도 없이 첨언됐을 테지. 나는 등나무 전설을 그냥 지루한 강의 시간에 잠깐 스쳐 가는 자극적인 광고쯤으로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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