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백발 교수님의 강의가 끝난 후 나는 여자를 밝히는 동기 녀석과 함께 점심 식사를 하기 위해 학교 후문 쪽으로 향했다. 학교 후문 식당가는 교내 학식보다 가격이 약간 비싸서 자주 가는 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일주일에 한 번쯤은 학식보다 약간 퀄리티 있는 식사로 가벼운 사치를 부렸다. 동기 녀석은 갑자기 급한 전화가 걸려왔는지 30분 뒤 식당 ‘꽃보라’에서 보자는 말을 메모처럼 남기고 후문으로 향하는 둘만의 행군에서 이탈했다. ‘꽃보라’는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분위기 좋은 카페나 꽃집을 연상할 법도 하지만 실은 매콤 달달한 제육볶음이 주력인 아담한 식당이었다.
예상과 현실을 뒤엎는 반전이 있는 식당 ‘꽃보라’. 여자를 밝히는 동기 녀석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한 결과이긴 하지만 우리가 그 식당을 자주 가는 데는 나름의 이유와 명분이 있었다. 봄꽃의 화사함을 닮은 여자 아르바이트생은 ‘꽃보라’가 내세우는 아름다운 간판이었다. 꽃을 보러 ‘꽃보라’에 가는 날은 낡은 기계처럼 삐걱대며 돌아가는 대학 생활 속 고급 윤활유와도 같았다. 예전에 나보다 조금 더 용기 있는 동기 녀석이 식당 사장 아주머니에게 가게 이름에 대해서 물은 적이 있었다. 사장 아주머니는 요조숙녀처럼 부끄러운 기색을 얼굴에 묻히고 오래 봉인된 보물상자를 열 듯 가게의 비밀을 조심스럽게 알려주셨다. 본인의 이름이 보라인데 젊었을 때 남학생들로부터 꽃보라는 애칭으로 불렸었다고. 세상엔 의외로 비밀답지 않은 비밀이 많았다.
동기 녀석 없이 혼자 ‘꽃보라’를 찾아가는 길은 인산인해였기 때문에 그리 외롭진 않았다. 하긴 먹거리가 많은 골목이다 보니 대학생들이 늘 붐비는 건 당연했다. 좀비에게 옷깃이라도 스치면 게임 오버가 되는 비디오 게임처럼 좁디좁은 골목에서 신경을 바짝 곤두세우고 사람들을 이리저리 피해 다니며 ‘꽃보라’를 향해 조금씩 전진했다. ‘꽃보라’에 당도했을 무렵, 안타깝게도 동기 녀석이 오기까지는 무려 15분이라는 시간이 남아 버렸다. 난 혼밥족 체질이 아니었기에 식당에 혼자 들어가서 주문을 건네는 건 영 뻘쭘하고도 어려운 도전이었다. 난 15분이라는 시간을 근처 동네를 기웃거리며 가벼운 산책을 통해 허비하기로 결정했다.
식당가를 좀 벗어나서 주택가들이 밀집된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드디어 동네다운 시퀀스가 눈앞에 등장했다. 마주 보며 일렬로 늘어진 주택들은 각자의 개성을 잃은 채 한동네라는 이름으로 묶여 있었다. 평일 오후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동네는 다른 체취를 띤 삶의 냄새로 가득한 사람들로 붐볐다. 흰 와이셔츠에 빨간색 넥타이를 걸치고 서류 가방을 어깨에 맨 채로 바쁘게 이동하는 아저씨, 단정한 교복 차림을 하고 대문 앞을 기웃거리는 여학생, 나이에 비해 왠지 걸음이 빨라 보이는 노년의 할머니, 유치원 원복을 입고 팽이를 돌리고 있는 어린아이들. 왠지 이 시간대에 동네에 있어서는 안 될 것 같은 사람들이 동네 골목 곳곳에 부자연스럽게 섞여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이 동네는 같은 모양으로 늘어서 있는 주택보다는 오히려 동네 사람들이 더 개성이 있어 보였다. 동네 구경을 하느라 잠시 정신을 놓은 사이 15분은 훌쩍 지나 있었다. ‘꽃보라’에 돌아가기 위해 왔던 길을 되돌아갔지만 전혀 엉뚱한 놀이터가 숨바꼭질 놀이의 술래처럼 날 맞이하고 있었다. 분명 내가 거쳐온 동선 상엔 놀이터가 없었는데……. 여긴 어디지?
나는 태생적으로 길치였다. 어머니가 말씀하신 바에 따르면 나는 어렸을 적부터 길치라는 영역에 있어선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다. 어머니는 내가 길을 하도 잃어버려서 부모님의 애간장을 새까맣게 태운 적이 한두 번이 아니라고 하셨다. 시장에만 나가면 어머니 손을 꼭 붙들고 있어도 어느 순간 바람에 흩날리는 비닐처럼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고 한다. 드문드문 깨진 기억의 조각만 남은 어린 시절이지만 시장에만 나가면 시장 사람들은 그리 날 이뻐하며 길거리 음식도 쥐어주고 말도 정답게 건네면서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셨다. 하지만 어머니는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며, 시장에선 오로지 나를 잃어버린 기억밖엔 남지 않는다고 하셨다. 아마도 사건의 주체이자 당사자는 나였기 때문에 어머님의 기억과 동떨어진, 나만의 기억일지도 모른다. 사실 운명을 결정지을 중대한 기억들도 아니었다. 엄밀히 말하면 인신매매를 당한 것도, 행방불명이 된 것도 아니었다. 시장통에서 자식을 잠깐 놓치는 일은 자식을 키우는 가정이라면 자식 성장의 역사 속에서 몇 번씩 거쳐야 하는 통과의례이기도 했으니까. 나이가 들면 자연스럽게 바뀔 줄 알았지만 내가 길치라는 사실은 아직도 여전히 변함이 없는 불변의 진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