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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시 현곡면 오류리 등나무 3

단편소설

by 이현기

봄이 피웠던 꽃들은 사람들의 기억 속으로 파묻혀 이젠 낙화의 흔적도 찾을 수 없는 무더운 여름이 다가왔다. 국어국문학과에 여름이 왔다는 건 문학 답사 날이 가까워졌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등나무꽃 역시 진즉에 모두 져버려서 세상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대학에 입학해서 처음 떠나는 문학 답사라 수학여행을 떠나기 전날 밤만큼 가슴속에 설렘이란 꽃을 피워낼 수도 있었겠지만, 문학 답사는 설렘과는 거리가 먼 이벤트였다. 단지 강의 장소가 교실에서 야외로 바뀌었을 뿐 문학 답사는 대학 강의의 연장선상이라고 봐도 무방하다는 말을 작년에 답사를 다녀온 선배한테 얼핏 들은 적이 있었다. 백발의 교수님과 국어국문학과 동기 20명이 떠나는 사제동행의 경주 문학 답사.


드디어 답사 날이 달갑지 않은 손님처럼 찾아왔다. 2박 3일의 부담스러운 일정을 가슴 한편에 무겁게 싸매고 경주행 고속버스에 짐짝처럼 몸을 실었다. 여자를 밝히는 동기 녀석한테 창가 쪽 자리를 의외로 쉽게 양보받아 투명한 창문에 이마를 푹 기댄 채 나와 반대로 흘러가는 파노라마 풍경을 멍하니 바라봤다.


나에게 경주는 고등학교 수학여행 때부터 특별하고 기묘한 인상을 남긴 도시였다. 유적과 유물이 도시 전체에 보물같이 숨겨져 있어서 뭔가 보물을 찾지 않으면 도시를 빠져나갈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그 도시를 거닐고 있노라면 마치 옛날 신라시대 화랑이 된 것만 같은 늠름한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하지만 경주의 진짜 매력은 무엇보다 친근함과 정겨움이었던 것 같다. 현지인인지 타지인인지는 모르겠지만 귀한 손님을 맞이하듯 날 향해 손을 힘차게 흔들어주거나 정겨운 웃음을 섞어가며 반갑게 인사를 건네는 사람들이 많았다. 어디서 왔냐, 어디를 구경 갈 거냐, 어디가 좋다, 꼭 가봐라 등 마치 관광안내소에서 홍보를 나온 열혈 인턴 가이드처럼 내게 친절한 호의를 베풀었다.


크다면 크고 작다면 작은 도시지만 난 경주에서도 길치라는 재능은 쉽게 변하지 않았다. 황룡사지에서 우리 반 친구들인 줄 착각하여 다른 학교 친구들과 섞이어 그들을 따라갔다가 이상한 논밭에 홀로 남겨져 행인들에게 길을 묻고 물어서 숙소까지 돌아온 적도 있었다. 신기한 건 담임 선생님과 학급 친구들은 행방불명된 날 찾기 위해 전화를 수십 번 걸었다는데 내 핸드폰엔 부재중 전화가 왔다는 알림이 전혀 뜨지 않았다는 점이다. 어쨌든 나쁜 사람들에게 납치된 것도 아니고 숙소는 잘 찾아왔기에 예전 시장통에서 어머니를 잃어버린 일과 비슷한 사건쯤으로 치부했다. 그래서 그런지 이번 문학 답사도 조금은 걱정이 되었다. 고등학교 때는 미성년자라는 어리숙하고 치사한 알리바이가 있었지만 이젠 어엿이 스무 살 성인이 되었기 때문에 자발적 행방불명이라는 범죄에 대해서는 알리바이가 전혀 통할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서울과 경주 사이를 수백 번을 왕복하여 경부고속도로가 집 안마당 같은 고속버스는 능숙한 주행 성능을 뽐내며 어느덧 경주 톨게이트를 통과하고 있었다.


경주에 도착한 첫째 날은 다행스럽게 특별한 일정은 없었다. 교수님께 답사 일정을 간단히 안내받은 후 숙소에 짐을 풀고 근처 식당에서 조촐한 저녁을 술과 함께 곁들였다. 백발의 교수님께서는 내일 등산을 해야 하니 오늘은 딴짓하지 말고 일찍 잠자리에 들라고 나긋한 목소리로 경고하셨다. 내일 일정은 고전소설 금오신화의 창작지인 남산 금오봉 용장사지라는 말도 덧붙이셨다. 적당히 취기가 올랐지만 눈치가 빠른 교수님께서는 양손으로 무릎을 부여잡고 가벼운 신음 소리를 내시며 무거운 몸을 일으키시더니 숙소로 먼저 돌아가셨다. 우리는 생각보다 늦게 자리를 떠난 교수님을 잠깐 원망한 후, 피 끓는 청춘의 혈기와 주사와 객기로 ‘까르페디엠’을 외치며 경주에서의 첫날밤을 하얗게 불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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