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술은 절대로 섞어 마시는 게 아니라는 것을 매번 자성했으면서도 진정한 참회로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인간은 늘 과거를 잊어버리고 실수를 반복하는 동물이기 때문이다. 지난밤에 마신 폭탄주의 여파인지 잠에서 깨자마자 머리에 폭탄을 맞은 듯 심한 편두통이 아침부터 찾아와 날 괴롭혔다. 맘 같아서는 하루 종일 시체처럼 숙소에 안치되어 영영 깨어나지 않을 잠의 늪 속으로 가라앉고 싶었다. 사명감 강한 답사 조장은 그만의 지독한 숙취를 부여안고 각 방을 일일이 돌아다니며 생명의 빛이 꺼져 가는 시체들을 부활시키는데 정신이 없었다. 교수의 눈 밖에 나서 시체 같은 학점을 피하기 위해선 어찌 됐든 사람 구실은 해야만 했다. 물리적 두통에 정신적 두통이 더해지니 통증은 점차 두꺼운 바늘이 되어 신경 세포들을 여기저기 날카롭게 찔러댔다.
가벼운 여장을 대충 챙겨서 숙소를 나와 근처 해장국집에서 쓰린 속을 겨우 달랜 후 답사 일행은 금오봉으로 가는 시내버스를 기약 없이 기다렸다. 답사 조장이 편의점을 들러 점심에 먹을 간편한 도시락을 사가지고 온 사이 기막힌 타이밍으로 버스가 도착했다. 타지의 시내버스를 실로 오랜만에 타본 것 같다. 시내버스를 탈 때마다 느꼈던 것이지만 왜 항상 시내버스는 사람들로 붐빌까? 설 자리도 마땅치 않은 공간에서 여유롭게 앉아 있는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복을 타고난 걸까? 중고등학교 시절 시내버스로 집과 학교를 오갈 때부터 늘 갖고 있던 풀리지 않는 의문이었다. 버스 좌석에 앉아보는 게 하루를 여는 소박한 소원이었지만 늘 어림도 없었다.
경주의 시내버스는 학생 시절의 통학버스처럼 여전히 사람들로 북적거렸고 각양각색의 로컬 언어들이 믹스커피처럼 섞이며 달콤하고 정감 가는 제3의 언어를 창조해 내고 있었다. 마치 전혀 경험하지 못했던 미지의 세상에 발을 디딘 것 같았다. 북새통인 상황이었기에 앉을자리가 마땅히 없어서 하차하는 출입문 쪽에 간신히 터를 잡았다. 덜컹대는 버스의 리듬에 맞추어 내 몸도 버스와 합을 맞추듯 연신 비틀거렸다. 버스 손잡이를 잡고 있는 두 손엔 어느새 혈관이 상징처럼 불쑥 튀어나왔고, 두 다리는 마치 접착제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버스 바닥과 힘겨운 씨름을 하고 있었다. 버스 안은 외지에서 온 젊은 대학생들의 채 가시지 않은 술 냄새, 뽀글 머리 아주머니들의 진한 싸구려 화장품 냄새, 아저씨들의 심벌과도 같은 목욕탕 스킨 냄새, 할머니들의 오랜 삶이 집약된 구수한 시골 냄새, 그리고 정체 모를 단 냄새가 물씬 풍겨대고 있었다.
서남산 주차장에서 하차를 하자마자 교수님은 학생들이 각개전투를 하지 않도록 둥근 대형으로 집합을 시킨 후. 소대장처럼 오늘의 코스와 작전에 대해 간단히 브리핑하셨다. 삼릉에서 출발, 금오봉을 찍고 용장사지 쪽으로 내려오는 비교적 평범한 등반 코스에 중간중간 강의가 섞여 있는 일정이었다. 교수님께서는 금오봉이 468미터 고지이니 가볍게 산책이나 다녀오자고 우리를 안심시키셨다. 붕어같이 어리석은 몇몇 동기들은 생각보다 짧은 거리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난 468이라는 숫자에 담긴 거대하고 무서운 비밀을 알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의 손에 이끌리어 등산을 자주 다녀 본 나로서는 468이란 숫자는 바로 거리가 아니라 높이라는 것을 이른 나이부터 체득했다. 숙취가 신체를 짓밟고 있는 이 상태론 468미터를 걷기도 힘들 것 같은데 468 고지에 있는 금오봉까진 과연 몇 미터를 걸어가야 할까? 나의 의문은 곧 등산길 초입에 세워진 나무 재질의 표지판을 확인한 후 바로 해소되었다. 정답은 3킬로미터의 오르막길이다.
걸으면 걸을수록 불법 미터기를 단 택시의 요금처럼 나의 기운은 걷잡을 수 없이 빠르게 빠져나갔다. 걸어가는 길 속에는 목이 잘린 불상들이 군데군데 놓여 있었다. 산을 지킨다기보단 마치 버려져 있다는 인상이 강하게 들었다. 억불숭유정책의 가혹한 희생양이 된 가련한 불상들은 액운을 막아주는 힘을 완전히 잃은 듯 보였다. 드디어 3킬로미터의 오르막을 걸어 높이 468미터의 금오봉에 도착했다. 산을 많이 다녀 본 축에 속해서인지 나는 이곳 금오봉이 산의 정상이라는 느낌을 주기엔 뭔가 허전하고 빈약해 보였다. 그냥 가벼운 산책 코스에 놓여 있는 전환점 정도의 느낌이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