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답사 일행은 여기저기 산개하여 미리 준비해 온 편의점 도시락으로 대충 점심을 때웠다. 교수님께선 A4 2장 정도의 강의 자료를 각자에게 정성스레 나눠주시고 고전문학의 향기와 역사에 대해서 웅장하게 설명하셨지만, 지난밤 술과 치른 치열한 전투로 인해 강의를 들을 기력이 빠져나간 상태였기 때문에 그다지 귀에 쏙쏙 박히진 않았다. 금오봉에서 한 시간 정도의 시간을 그렇게 허비하고 우리 일행은 용장사지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용장사지’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용장사는 지금은 사라진 절이다. 절터만 남아 있으니 당시 김시습이 어떤 영감을 가지고 어떤 환경 속에서 어떤 분위기에 취해 소설을 지었는지 일절 감이 오지 않았다. 눈치 없는 교수는 우리의 냉랭한 무관심에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금오신화 속 소설들의 창작 배경, 주제 의식 등을 문학 자습서 집필진처럼 혼자 떠들어대셨다. 사실 목이 잘린 불상들을 애처롭고도 신비한 시선으로 관찰한 것 외에는, 이곳에선 어떠한 문학적 영감이나 감흥이 떠오르지 않는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일분일초라도 빨리 이곳에서 벗어나 안락한 숙소로 돌아가 아직 남아 있는 지독한 숙취를 달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하산길이 주는 물리적, 심리적 경쾌함 때문인지 내려가는 속도가 점차 붙기 시작했다. 내려가다 보니 유격 훈련 후 복귀하는 오합지졸 군대의 행군 무리처럼 일행 사이의 촘촘했던 간격이 조금씩 멀어지기 시작했다. 난 길치였기 때문에 선두가 아닌 행군의 꼬리 부분에 포지션을 잡아 대열을 따라가고 있었다. 태생적인 길치이기도 했지만 후천적인 숙취가 더해지니 앞서가는 일행을 따라가기 너무 벅찼다. 답사 일행은 하산객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섞이며 정체성을 잃어가는 중이었다.
여름에 어울리지 않게 가벼운 아웃도어 점퍼 차림을 한, 두 여인이 진한 나무 냄새를 풍기며 나를 앞질러 갔다. 화장품 냄새도 아닌, 묘하지만 익숙한 향이었다. 어디서 맡아봤더라? 향기가 주는 묘한 여운은 내 신경을 두 여인 쪽으로 자연스레 인도했다. 두 여인은 더 이상 하산의 가속도를 붙이지 않고 내 앞에서 일정한 간격을 유지한 채 듣기 어려운 말들을 서로 소곤대며 하산을 진행하고 있었다. 언제부터인지 우리 일행은 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예전 경주에서의 수학여행 때처럼 자칫 또 한 번 실종될 수 있다는 현실적이고도 개연성 있는 공포감이 무섭게 엄습하면서 길치의 하산 속도는 조금 빨라졌다. 두 여인을 지나치려는 찰나 단발머리 위에 하얀색 뉴욕 양키스 모자를 눌러쓴 여인이 갑자기 친근하게 말을 걸어왔다. 그녀에게선 이름 모를 나무 향이 풍겼고 모자에 채 가려지지 않은 복숭아빛 피부가 유난히 보드라워 보였다.
“여긴 처음인가 봐요?”
서글서글한 눈매가 판화처럼 새겨진, 호감형의 여인이었다. 옆에 있던 다른 여인은 색깔이 다른 아웃도어 점퍼를 걸치고 갈색의 긴 생머리 위에 선글라스를 멋지게 올려 쓴 채로 뭐가 그리 신났는지 날 보고 킥킥 웃어댔다.
“네, 경주는 몇 번 와 봤는데 이 산은 처음이네요.”
뉴욕 양키스 모자를 눌러쓴 여인은 횟집의 수족관에서 횟감으로 쓸만한 물고기를 구경하듯 올망졸망한 눈빛으로 나에게서 시선을 좀처럼 떼지 않았다. 그 여인과 잠깐 눈빛을 마주쳤을 뿐인데 그 눈빛 속엔 어둠과 밝음이 공존하여 여태껏 느껴본 적이 없는 기묘한 광채를 발산하고 있었다. 그 심연의 눈빛을 계속 보고 있노라니 왠지 블랙홀처럼 끝없이 그 속으로 빠져들 것만 같았다. 얼굴을 붉히며 그녀를 바라보던 시선을 황급히 거뒀다. 갈색 머리 여인은 여전히 기분 나쁘게 킥킥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