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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현기 Aug 29. 2024

가위눌림을 자를 수 있는 가위가 있어요.

가위눌림에서 인생을 배운다.

 무더위도 마지막 기승을 부리고 있는 여름 끝자락의 학교 점심 식사 시간. 연일 지속되는 더위는 동료들과 소소하게 나눌 이야깃거리마저 증발시켜 버렸다. 우린 별다른 대화 없이 절에서 공양밥 먹듯 정적을 우적우적 씹고 있었다. 우리 테이블이 너무 고요한 산사 같았을까. 옆테이블에서 젊은 여자 선생님끼리 나누는 사소한 대화들이 마치 라디오 채널을 돌리다 우연히 잡힌 주파수처럼 희미하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가위눌려 본 적 있으세요?"

"아뇨. 전 태어나서 한 번도 가위에 안 눌려 봤어요. 자고 있는 중에 몸이 안 움직여져서 의식적으로 몸을 까닥거려 깨어나 보려고 한 적은 있었지만."

"저... 선생님... 그게.... 가위눌린 건데요..."

"아... 그게 가위구나."


 태어나서 한 번도 가위에 눌려보지 않은(?) 선생님께는 죄송한 말이지만 백치미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알차게 현장 체험 학습을 한 기분이 들었다. 기왕 가위눌림 이야기가 나온 김에 잠깐 기억을 더듬어 과거에 가위에 눌렸던 경험을 소환했다. 나에게 있어 가위눌림은 보통 우울하거나, 절망스러웠던 순간에 예고도 없이 불쑥 찾아왔다. 계속되는 임용고사 불합격으로 내 삶에 대한 비관 지수가 극도로 위태로웠을 때, 어마무시한 괴력을 지닌 가위눌림이 크게 한 번 찾아온 적이 있었다. 보통 가위눌림이 찾아오면 눈을 뜨기 위해 안간힘을 쓰거나, 마지막 힘을 짜내어 손가락을 힘겹게 까딱거려 간신히 깨어나곤 했었는, 그날 찾아온 가위눌림은 기존에 겪어보지 못한 무시무시한 압력으로 나를 짓누르고 있었다. 두려운 기분이 서늘하게 엄습했지만 이대로 놔두면 곧 죽을 것 같았기에 고중량의 역기를 들 듯 무거워진 눈꺼풀을 힘겹게 추켜 올렸다.  순간 내 배 위에 올라타 있는 그녀를 만났.


 버젓이 내  위에 올라가 있는 아가씨, 아니 여자 귀신은 차밍한 검은색 긴 생머리를 풀어헤쳐 얼굴을 전부 뒤덮은 채 날 응시하고 있었다.(얼굴 전체를 감싸는 독특한 헤어 스타일링 덕에 다행인진 몰라도 그녀의 눈은 보이지 않았다. 예뻤을까?) 얼핏 체형을 봤을 땐 그리 몸무게가 나가지 않을 것 같아 보였는데 하얀 소복 안에 감춰진 뱃살이 많은지 몰라도 몸을 전혀 움직일 수가 없을 정도의 무게감이 날 짓누르고 있었다. 가위 귀신들은 주짓수 유단자들을 특채로 뽑는 것일까. 쓸데없는 말이 길었지만 아무튼 대형 선박의 닻줄로나 쓰일 법한 굵은 쇠사슬이 몸 전체를 촘촘히 결박하고 있는 것처럼 도저히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무력감이 날 구속하고 있었다.


 더욱이 그녀는 어마무시한 손아귀힘으로 내 목을 조르고 있었기 때문에 호흡은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만 같았다. 긴 생머리의 청순한 여인치곤 목소리는 날카로운 금속음이었다. '죽어!!'라고 냅다 소리를 지르는데 이래서 사람 목소리는 외모로 판단하면 안 되는구나,라는 직관적인 결론내릴 겨를도 없이 상황은 심각했고 곧 다가올지도 모를 죽음을 닭살처럼 실감했다. 교회를 다녔기 때문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최후의 필살기(라고 생각했던) 주기도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목이 눌려 있어서 목소리가 안 나왔기 때문에 평소 기도하듯 마음의 소리를 애타게 부르짖었다.


'하늘에 계시는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이건 좀 의외다. 분명 통할 것 같았는데 전혀 통하지 않았다. 손오공이 회심의 일격으로 원기옥을 던졌는데 꿋꿋이 살아 있는 프리더의 모습이랄까.(드래곤볼 세대라 구시대적 비유를 썼습니다...) 그녀는 나의 애처로운 발악을 비웃기라도 하듯


 '그거라도 암송하면 내가 엄마야 무서워, 하고 도망칠 줄 알았어? 약해, 약해. 좀 영혼을 담아서 부르짖어 봐. 어쨌든 난 널 데려가야 승진 가산점이 붙는다고. 그만 포기하고 가자.'


 라고 말하는 듯했다. 마지막 비책까지 안 통하니 생의 의지는 김 빠진 콜라처럼 스르르 새어나가기 시작했다. 인간으로 태어나서 뭔가를 이루지도 못하고 실패와 어영부영함만 남긴 채 세상을 하직하는 것 같아 조금 한스러웠지만, 출구 없는 절망 고통으로 가득 찬 현재의 삶에서 해방될 수도 있겠다는 안도감도 들었기에 더 이상 억지로 힘을 짜내지 않고 몸의 모든 긴장을 풀어 그녀에게 생의 주도권을 넘겨주기로 했다. 그때였다.


'띠띠띠띠, 띠로링. 덜컹.'


 잘 짜인 각본처럼 절묘한 타이밍에 여동생이 야간 근무를 마친 후 현관문 잠금장치를 풀고 집안으로 들어왔다. 순간 마른 비만의 그녀는 어딘가로 홀연히 사라졌다. 이렇게 죽을 운명은 아니었구나, 하는 삶의 가녀린 의지와 무거운 생명 존중 의식이 그녀가 떠나간 자리에서 봄의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막혔던 호흡의 통로가 뚫리니 이토록 공기가 맛있을 수가 없다. 국수 면치기 하듯 산소를 허겁지겁 들이마시며, 살아 숨 쉰다는 건 정말 아름다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화재가 일어났을 때 건물에 갇히는 상황을 대비해 실제 화재 발생 환경을 구현한 열연기 대피 체험이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어둠과 연기 가득 찬 암실 내부에서 참여자가 직접 각종 장애물 등을 극복하면서 탈출구를 찾아 바깥으로 빠져나오는 프로그램이다. 그녀와의 기묘한 만남 이후로 난 생각의 관점을 조금씩 바꾸기 시작했다. 현재 내 삶이 자욱하고 매운 연기로 가득 찼다고 그대로 주저앉아 버리면 고통뿐인 밀실에 갇혀 서서히 죽어갈 뿐이다. 희망 젖은 물수건으로 단단히 입을 틀어막고 기필코 나가고야 말겠다는 생의  의지를 놓지만 않는다면 저 어딘가 탈출구에서 새어 나오는 희미한 빛줄기가 상쾌하게 숨 쉴 수 있는 바깥으로 인도할 것이다.


 가위는 칼날이 두 개다. 한쪽 칼날은 '희망', 다른 한쪽 칼날은 '의지'라고 이름 붙이고 싶. 어린아이가 예쁜 색종이 꽃을 만들기 위해 모든 신경을 모아 정성스레 색종이를 자르듯 우리도 삶의 희망을 꽃피우기 위해 온갖 부정적인 감정과 염세적인 생각싹둑 재단해 보는 건 어떨까. 이제는 가위에 눌려본 적이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날만큼 단잠을 자고 다. 비록 가위눌림은 사라졌지만 나란히 자고 있던 아내의 가녀린(?) 다리 한쪽이 가끔 내 배를 무겁게 누른다. 숨이 막힐 것 같은데 주기도문이라도 외워야 하나. 영혼을 담아서...

호흡이 가빠오고 몸이 안 움직여 죽을 것 같다고? 그런데 있잖아. 왜 네가 네 목을 조르고 있어?


내 삶을 짓누르고 있는 건 결국 나의 마음가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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