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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현기 Apr 17. 2024

세월은 우리를 바보로 만든다.

식어버린 기억과 꿈을 데울 시간이다. 

할머니는 저승으로 가버리시고

나도 벌써 몇 년인가

그 일은 까맣게 잊어버린 후      

- 이성선 시인의 <고향의 천정> 중 일부


 기억과 감정을 상실시키기에 시간만큼 효과적인 게 있을까.  물론 완전히 잊혀지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당시의 고통스러웠던, 가슴 설렜던 기억과 감정도 시간이 흐르다보면 금새 잊혀지기 마련이다.


 세월호 10주기를 맞이하여 학교 곳곳에서 추모 행사가 열렸다. 몇몇 선생님들과 학생회 친구들이 며칠 전부터 공들여 준비한 노란 리본을 등굣길에 손수 나누어주면서 기억 속의 2014년 4월 16일을 다시 번 사람들에게 되새겨 주었다. 


 나도 노란 리본을 하나 받아들고 옛 기억을 끄집어 내보았다. 2014년 4월 16일 당시 기억이 선명하게 재생된다. 근무 중에 TV를 통해 송출되는 진도의 해상은 현실이라기보단 판타지에 가까웠다. 구조 작업이 잘 이루어진다는 앵커의 말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가도 믿을 수 없이 늘어나는 희생자의 수를 접할 때마다 신께 간절히 기도를 드렸다. 


 어느덧 10년이라는 세월이 무심히도 흘렀다. 그새 두 아이의 아빠가 되었고 중년의 나이가 되었다. 나는 지금 이 순간, 누군가를 가슴 속 깊이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나? 나는 누구에게 소중한 존재로 각인이 되었을까? 내 소중한 꿈을 간직하고 있나? 모두 아니다. 난 무심하게 흘러가는 세월에 내 삶을 의미 없이 밀어넣은 채 반복되는 일상을 그저 기계 부속품처럼 살아내고 있을 뿐이었다. 곰곰이 반추해보면 내 삶에 소중한 인연들과 꿈들이 무수히 흘러갔다. 그 끈은 어디서부터 끊어져버린 것일까?


 바보가 된 내 모습에 소름이 돋는다. 난 어쩌다가 이 지경까지 되었단 말인가. 지금 내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 난 살아가고 있나, 살아지고 있나. 시간이 약이라는 말에 깜박 속아서 애써 본질을 외면한 채 위선적으로 살고 있는 내가 경멸스럽게 느껴진다. 


 좋은 남편이, 좋은 아빠가, 좋은 교사가, 좋은 아들, 좋은 작가가 되고 싶었다. 

 현재의 나는 좋은 사람이 되어 있는가. 글을 사랑하고 있는가.

 민망함을 넘어 부끄러움이 슬며시 찾아온다.


 2024년 4월 16일, 출근길에 건네 받은 노란 리본은 나의 순수했던 본질을 일깨워주었다. 세월이 나를 기억상실증 걸린 바보로 만들기 전에, 더 위선적인 악인이 되기 전에 각성을 해야겠다는 결심이 선다.

 

 잠 못 들 정도로 열렬히 사랑했던 지금의 아내, 

 첫째 아이가 막 태어났을 때 흘렸던 눈물과 사랑의 다짐, 

 수줍게 교단에 서서 진정 내 자식들처럼 여겼던 수많은 학생들,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누구냐는 질문에 서슴없이 부모님이라고 답했던 어린 시절의 나,

 뜨겁게 사랑했던 많은 사람들. 그리고 가슴 벅차올랐던 간절한 꿈들.


 식어 버린 기억과 꿈을 따스히 데울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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