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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현기 Apr 20. 2024

우승을 못했는데 우승 상금이 두 배가 된 체육대회

우리는 함께 이루어 낸 거야.

'이건 뭐, 교직 인생 최약체의 전력인 걸?'


 체육대회 첫째 날이 끝나자마자. 어떠한 생각의 가공을 거치지 않고 야생적이고 원초적으로 피어난 직관적인 생각이다. 체육대회는 우리 반 아이들이 너무 착하고 순수한 아이들임을 재차 확인한 계기였다. 체육대회가 열리기 전, 담임선생님의 지시 및 전달사항을 너무나 충실히 따라주었으니 말이다. 


'체육대회의 본질은 경쟁이 아니라 하나 됨이고 협력이다.'

'우승한다고 군면제되는 거 아니다.'

'너희들의 당면과제는 중간고사다.'

'다쳐봤자 너만 아프고 너만 불편하고 너만 시험공부에 지장 있고 너만 손해다.'

'결론적으로 샘이 염원하는 최고의 체육대회는 안전한 체육대회이다.'


 분명 맘속으론 우승을 갈망하고 있었을 텐데 우리 반 아이들은 담임 선생님을 너무 존경한 나머지 거의 모든 종목에서 안전하게 탈락했다. 박빙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의 대패가 계속되었다. 반장 녀석은 자꾸 나한테 죄송하다고 사과를 하는데 사과를 왜 하는지 이해가 안 됐다. 너희들은 담임선생님 말을 잘 듣고 있을 뿐인데 말이지.


첫 경기였던 단체줄넘기. 모두가 힘을 모아 압도적 꼴찌를 달성했다.

 경기에서 계속 지다 보니 예상치 않은 돌발 변수가 발생했다. 아이들의 마음속에 패배 의식이 자리 잡기 시작하여 하나 됨이 아닌 분열의 징조가 팽배해지고 있었다. 어리석고 지혜가 모자란 담임은 개인의 안위와 아이들의 안전만 생각한 나머지 아이들이 느낄 성취감이라는 긍정적 자아 인식 요소를 간과한 것이다.


 먼 과거 속 체육대회를 즐기고 있는 학생 시절의 내 모습을 떠올렸다. 경기에 임했던 친구들과 함께 뜨거운 호흡을 내쉬며 승리라는 목표를 위해 생동의 에너지를 발산했었던 학창 시절의 내 모습. 한마음 한뜻이 되어 패배에 분노하고 승리에 열광하며 하나가 되어감을 배웠던 가슴 벅찼던 그 순간. 환희와 희열에서 비롯되는 공동체 연대 의식.


 아이들의 감정은 배제한 채 교사의 독단적인 입장만 생각했던 나 자신이 민망해지는 순간이었다. 학창 시절에 친구들과 거친 숨결을 공유하며 함께 뛰고 함께 웃고 울고, 넘어진 친구의 손을 붙잡아 주고 서로의 어깨를 토닥여주는 것은 답답한 교실에서는 절대 배울 수 없는 또 하나의 가치로운 현장수업임을 간과한 것이다. 


서로의 어깨를 부둥켜안으면 개인을 넘어 우리가 된다.


 '우리는 함께 한다'.'함께 이루어내다.'라는 협력적, 공동체적 가치관을 배울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담임 선생님의 무심함과 무지함이 뻥 걷어차버린 느낌이다. 아이들이 크게 안 다친 것은 오로지 나만의 만족이었던 것이다. 과연 아이들은 체육대회를 통해 무엇을 배웠을까. 자칫 패배의식을 내면화시키진 않았을까 걱정이 들었다.  난 참으로 나쁘고 덜 떨어진 교사다.


거의 모든 종목에서 떨어지다 보니 학급 자체적으로 e스포츠대회가 열릴 수밖에

 대회 둘째 날, 400m 계주에서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그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던 우리 반이 우승을 해버린 것이다. 마지막 주자가 결승 테이프를 끊는 순간, 내 몸이 먼저 반응을 해버려 난 마치 계주 주자처럼 전속력으로 우리 반 선수들에게 돌진하여 뜨거운 하이파이브와 포옹을 나눴다. 사실 나도 승리가 간절했나 보다. 거 봐. 무언가를 성취한다는 것은 이리도 가슴 벅차오르는 감동인데.


 승리의 선물은 이게 다가 아니었다. 체육대회가 거의 끝나갈 무렵, 교보교육재단에서 문자메시지가 날아왔다. 아이들을 위해 간식비나 벌어볼 요량으로 '우리 반을 소개합니다' 공모전에 참가해 놓고 까맣게 잊고 있었다. 명색이 국어 교사인데 글쓰기 공모전에 참가했다가 입상에 실패하면 너무나 낯부끄러운 일이었기 때문에 가족이나 학생, 교사들에게 철저히 비밀로 해두었다. 아마 결과 발표가 나왔나 보다.


합격통보가 아닌 확인통보라 당연히 떨어진 줄로만 알았다.

 보통 공모전에선 문자메시지를 통해 합격을 축하드린다고 통보가 오던데, 합격 통보가 아닌 결과를 확인해 보라는 통보를 받으니 아마 떨어졌을 것 같아 썩 기분이 좋지만은 않았다. 맥이 빠져서 교보교육재단 홈페이지에 들어가 결과 발표 게시판을 클릭했다. 어? 맙소사.


심장이 덜컹거리며 덜컥 합격을...

 입상이 된 것이다. 전혀 예상치 않던 일이라 기쁨을 주체할 수 없었다. 아이들에게도 이 기쁜 소식을 어서 알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벅차오르는 가슴을 부여잡고 교실에 들어가  대한독립을 선포하듯 강렬하고 근엄한 어조로 종례를 시작했다.


"비록 우승은 못했지만 우승 상금은 2배를 받았습니다."


 아마 아이들은 담임이 더위를 먹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꼴찌인데 우승 상금이 2배라니.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이들에게 일의 자초지종을 설명해 주니 그제야 환호하기 시작했다. 상금만 놓고 보면 체육대회 우승 상금이 십만 원 남짓이니 우리 반은 우승을 2번 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비록 아이들 몰래 나 혼자 작성한 글이지만, 글의 재료는 엄연히 우리 아이들이었다. 올해 1반을 못 맡았더라면 절대 안 나왔을 글이었으니까. 우리는 함께 글을 쓴 것이고 결국 같이 이루어낸 것이다.


이틀 동안 패배 의식에 젖어있었던 나와 우리 반 아이들은 체육대회 마지막 날 종례 때 모두가 함께 웃었다. 승리의 하이파이브를 나누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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