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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현기 Apr 03. 2024

벚꽃처럼 피어난 아이들

벚꽃엔딩

  '봄바람 휘날리며 흩날리는 벚꽃 잎이 울려 퍼질 이 거리를 우~우~ 둘이 걸어요'


 어느 대중가요 가수가 부른 <벚꽃엔딩>이라는 노래는 벚꽃 계절이 다가올 때쯤 각종 매체나 매장에서 계절유행가처럼 흘러나온다. 벚꽃은 피어 있는 기간이 길진 않지만 사람들의 낭만과 감성을 자극한다. 대한민국 사람들이 벚꽃 개화 시기에 맞춰 전국에 벚꽃 명소를 찾아다니는 걸 보니 벚꽃은 분명 사람들의 마음 어딘가를 두드리는 꽃일 터이다. 하지만 난 수많은 인파에 파묻혀 전국의 벚꽃 명소를 굳이 찾아다닐 필요가 없다. 내가 근무하는 학교가 벚꽃 명소이기 때문이다.  


 내가 근무하는 고등학교는 한 개의 학원 아래 4개의 학교(남고, 남중, 여고, 여중)로 이루어진 사립학교이다. 특히 매년 봄의 초입, 여학교를 끼고 있는 인조잔디 운동장 주변에는 오랜만에 만난 벗처럼, 반가운 봄빛으로 치장한 벚꽃이 흐드러지게 찾아와 지역 벚꽃 명소를 만들어 낸다. 화사한 벚꽃이 필 무렵, 학원 산하 4개 학교는 ‘벚꽃데이’라는 행사를 운영한다. 교사와 학생들은 규격화된 교무실과 교실을 벗어나서 벚꽃을 벗 삼아 야외에서 함께 게임도 하고 자유롭게 사진도 찍으며 잊지 못할 추억 앨범을 서로에게 선물하며 인상적인 하루를 마음에 새긴다.        


 교직 경력 처음으로 올해는 고1을 맡았다. 오랜 시간 고3만 맡아왔었기에 고1로 내려가면 아이들이 얼마나 싱그러울까, 싱싱할까, 신선할까 하는 나름 부푼 기대가 있었다. 하지만 고1 아이들과 생활한 지 한 달쯤 지나자 갱년기가 찾아온 부부의 심드렁함처럼 학기 초에 품었던 풋풋함은 점점 희미해졌다. 이제 아이들이 싱그럽다기보다 그냥 철이 없다는 생각이 편견처럼 내 의식 곳곳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분명 고등학교 1학년인데 중학교 4학년 같았으니 말이다.     


 올해도 어김없이 벚꽃을 품은 봄은 계절의 문을 두드렸고 모두의 기대 속에 벚꽃데이가 열렸다. 1, 2, 3학년 전교생이 벚꽃나무가 올망졸망 붙어 있는 여학교의 운동장으로 우르르 몰려갔다. 남학생들이 이렇게 벚꽃을 기다렸나,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크나큰 착각이다. 녀석들은 여자 학교라는 공간에 머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아드레날린이 끓어오른 것이다. 막상 신나게 행사장에 집결해 놓고 여자 사람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는 현실에 실망했는지 아이들은 맥없이 우물쭈물 쭈뼛거리고만 있다. 보다 못해 내가 직접 나서서 우선 학급 단체 사진 먼저 찍어 놓고 나머지 시간은 너희들 하고 싶은 거 라는 식의 성의 없는 지시사항을 차갑게 전달했다. 학급별로 의무적으로 단체 사진을 한 장씩 찍어서 행사를 주관하는 학생부로 제출해야 했기에 숙제를 얼른 끝내고 싶은 마음이 앞선 것이다. 숙제 먼저 끝내 놓고 남은 시간은 아이들과 동떨어져서 책이나 읽으며 시간을 보내야겠다는 내막 음흉하게 깔려 있었다. '뭐 어때? 아이들도 핸드폰으로 게임이나 하겠지',라는 옹졸한 생각은 덤이었다.

숙제처럼 찍은 단체사진

                                

 제출 마감 기한이 얼마 안 남은 수행평가처럼 급하게 단체 사진을 찍고 우리 반 아이들과 나는 쿨하게 이별했다. 막상 헤어졌지만 나 역시 어디에 적을 둘지 몰라 친한 선생님이 운영하는 행사장을 기웃거리기도 하고, 여고에 근무하시는 선생님께 부탁해서 믹스 커피도 얻어 마시고, 벤치에 앉아 글을 읽기도 하면서 그냥저냥 시간을 때우고 있었다. 그래도 담임으로서의 책임감이 고개를 빼꼼 내밀면 잠깐씩 우리 반 아이들의 동향을 살펴봤다. 이미 아이들은 여기저기 난잡하게 섞여 있어서 다시 하나로 뭉치긴 어려워 보였다. 한 학급을 보니 운동장 가운데에서 교사와 학생들이 둥그렇게 원을 만들어 추억의 수건 돌리기를 하고 있었다. 쯧쯧, 이렇게 좋은 날에 유치하게 수건 돌리기라니. 그런데 재밌어 보인다. 나도 하고 싶다... 안 돼. 정신 차려!


 수건 돌리기 딜레마에 빠져 있을 무렵, 갑자기 부반장 녀석이 다급히 날 찾아왔다. 야외 활동이라 무슨 사고라도 난 건 아닌지 괜스레 걱정되었다. 부반장 녀석이 던진 말은 묵직한 강속구가 되어 내 마음에 아프게 꽂혔다.    


“샘, 샘이 필요해요. 샘이 없으면 안 돼요.”     

“왜? 뭐 할 건데?”     

“여장 좀 해주세요.”     

“…….”     


 부반장 녀석은 자신의 핸드폰으로 미리 준비한 콘셉트 사진을 보여주며 나에게 핑크 요정으로 변신해 줄 것을 강요했다. 다른 학급처럼 담임과 학생들이 어울려 수건 돌리기를 못해줌에서 파생된 일말의 양심은 여장을 해달라는 부탁을 흔쾌히 수락했다. 나잇값을 못하는 것 같아 찝찝하긴 했지만 아이들이 준비해 온 핑크색 가발과 선글라스를 쓰고 그들이 요구하는 포즈를 성심성의껏 연출해 주었다.               

핑크 요정


 교사로서의 위신과 체면 따위는 과감히 버리고 아이들이 원하는 대로 콘셉트 사진을 찍는 동안 난 그들의 얼굴에 점차 행복이 그려지고 있음을 발견했다.  그동안 교실에서는 발견하지 못했던,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기쁨과 행복이 묻어난 얼굴.


‘저 아이가 저렇게 활짝 웃을 수 있구나.’

‘저 아이가 말이 저렇게 많은 아이였나?’

‘저 아이한테 저런 유쾌한 면이 있었나?’   

       

 나의 망가짐이 아이들에겐 기쁨이란 마음가짐을 선물해 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교사는 학생들에게 어떤 존재일까? 어떠한 존재가 되어야 할까? 여태껏 ‘너’(학생)와 ‘나’(교사)였던 각자의 관계성이 이젠 ‘우리’(교육공동체)라는 모두의 관계성을 향해 한 걸음 나아간 것 같았다. 앞으로 아이들과 함께 밟아 나갈 다두 걸음, 세 걸음은 나에겐 어떤 깨달음과 가르침을 줄까?


 오늘 아이들이 나한테 쓰여준 건 핑크색 가발이 아니라, 벚꽃색으로 물들인 따스함과 행복이었다. 오늘 내 마음 어딘가를 두드린 건 벚꽃이 아니라 벚꽃 같은 아이들이었다. 벚꽃은 금세 지겠지만 벚꽃 같은 아이들이 일 년 내내 피어 있는 이 학교는 행복의 꽃망울을 터뜨리는 벚꽃 명소이다. 


 노래는 잘 못하지만 선생님이 오늘은 너희들을 생각하며 노래 한 소절 불러야겠다. 부디 말리지 마렴.


'봄바람 휘날리며 흩날리는 벚꽃 잎이 울려 퍼질 이 학교를 우~우~ 함께 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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