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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현기 Mar 30. 2024

마음은 다이어트가 필요 없습니다.

정남진토요시장에서 마음을 찌우고 갑니다.

         

“오빠, 우리 소고기 사러 장흥에 다녀와야 해.”   

       

 월화수목금을 치열하게 견디고, 버티고, 싸우고 나서 맞이한 금쪽같은 토요일 아침. 소고기를 사러 장흥에 다녀오자는 아내의 말은 판타지 영화 속에서나 나올 법한 대사로 들릴 만큼 현실적이지 않았다. 게으른 몸은 뇌 속 뉴런들에게 어서 일어나라고, 큰일 났다며 다급하게 부르짖었다. 막 잠에서 깬 뉴런들은 졸린 눈을 비비며 이 상황에 대해 약삭빠른 정보처리 활동을 개시했다.     


‘소고기는 동네 마트에서도 판다. 굳이 장흥까지 갈 필요는 없어 보인다.’     

    

‘왕복 130여 km + 왕복 2시간 = 연료 낭비이자 시간 낭비이다. 즉, 기회비용이 너무너무 좋지 않다.’   

       

‘주말에 푹 쉬어 줘야 곧 다가올 월화수목금이란 어마무시한 녀석을 대비할 수 있다. 내 삶은 월화수목금금금이 아니라 월화수목금토일을 원한다.’      

    

 나름 만족할 만한 출력값이 나온 것 같아 흐뭇했다. 하지만 아내의 이어지는 말은 애초에 입력값부터 잘못되었다는 것을 넌지시 알려주었다.     


“내일 부활절이라, 성도들 식사 대접용 소고기 사러 가는 거야. 동네 마트도 있지만 날도 날이니 이왕이면 좋은 걸로 사야지.”          


 뇌 속 뉴런들이 민망해지는 순간이었다. 난 아직도 멀었구나. 지금도 상대방을 깊게 헤아리는 마음이 부족하구나. 그렇게 선량하게 살아가자고 다짐, 또 다짐해 봐도 마음이 실천으로 이어지기는 결코 쉬운 게 아니구나. 내 뉴런들은 부끄러움을 못 이겼는지 어느새 자취를 감춰버렸고 뉴런들이 도망친 빈자리는 따스한 감정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아들내미들을 보따리처럼 챙겨서 우리 가족은 장흥에 있는 정남진토요시장으로 향했다. 국도를 따라 남쪽으로 향하다 보니 벚꽃 나무에 올망졸망 붙어 있는 꽃망울들이 다음 주에 찾아올  찬란한 개화를 위해 저마다의 스케줄을 짜고 있었다.     


 정남진토요시장에 도착했다. 탐진강가에 마련된 주차장에 차를 모셔 놓고 아빠와 엄마, 두 아들 녀석은 시장 쪽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동안 대형마트가 주는 안락함과 편의성에 취해있어서인지 전통 시장은 실로 오랜만에 방문한 것 같다. 명절 때나 돼서야 본가에 들르는 무심한 자식처럼 익숙한 듯하지만 어색한 기분으로 시장을 돌아다녔다. 구수하고 정겨운 사람 냄새가 시장 여기저기에 봄나물의 향취처럼 묻어 있었다.     

 

 불고기용 소고기 쇼핑이 끝나자마자 우리 가족은 뭔가에 홀린 달콤한 기름 냄새의 근원지를 찾아서 좀비처럼 움직였다. 그곳엔 갓 튀긴 핫도그가 기름땀을 뻘뻘 빼고 있었다. 어린 시절, 어머니를 따라 시장에 가면 어머니는 어린 짐꾼 노동자의 노고를 치하하며 그날의 수당으로 핫도그를 사주셨다. 쫀득한 튀김옷 깊은 곳에 보물처럼 숨겨져 있는 빨간 소시지를 한 입 베어 무는 순간 내 입안에는 세상 황홀한 맛의 향연이 펼쳐졌다. 군대를 다녀와서 복학한 후 일주일에 한 번 대학 신문을 돌리는 근로 장학생 활동을 할 때도 내 점심 메뉴는 언제나 간편하고 맛있는 길거리 핫도그였다. 뭐니 뭐니 해도 핫도그의 최고봉은 아메리칸 본토 핫도그가 아닌, 시중의 냉동 핫도그도 아닌, 시장에서 판매하는 길거리 핫도그라고 감히 단언할 수 있다.     


절세미인과 두 왕자들

 잠시 과거에 한눈을 판 사이, 첫째 아들은 콜팝을, 둘째 아들은 핫도그를 사달라고 졸라대고 있었다. 녀석들이 어린 시절의 나처럼 짐꾼 노동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자식을 위한 부모의 애틋한 마음은 나로 하여금 흔쾌히 지갑을 열게 했다. 내가 핫도그 마니아인 걸 아는 아내가 오빠 핫도그는 안 사냐고 의아해했지만, 오늘은 날 위한 핫도그가 필요 없었다.      


 사실은 장흥에 내려오는 길에도 내 뇌 구조는 오로지 핫도그란 단어로 가득 찼었다. ‘시장=핫도그 파는 곳’이란 인지 구조가 마치 교리처럼 각인돼 있었기 때문에 핫도그를 기필코 사 먹겠다고 다짐했지만, 오늘은 나를 위한 핫도그를 튀기고 싶진 않았다. 봉지 가득 담겨 있는 부활절 불고기용 소고기와 김이 모락모락 나는 핫도그를 애지중지 붙잡고 세상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는 둘째 아들 녀석을 보니 이미 내 마음의 배는 불룩 불러온 상태였기 때문이다.      


남을 위해 무엇인가를 해 준다는 것은, 허기진 마음을 살찌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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