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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현기 Sep 05. 2024

밥을 대체하는 알약이 개발된다면

밥에서 인생을 배운다.

 때론 밥 먹는 게 귀찮아지는 때가 있다. 미각의 만족이나 배고픔이란 결핍의 해소 차원과는 별개로 뭔가 의무적으로 밥을 먹어야만 하는 그런 때 말이다. 배부른 소리 같기도 하지만 음식을 잘하는 아내의 이름 석자를 걸고 장담컨대, 정말 그런 날이 있다. 한창 임용고사를 준비하던 시절엔 밥 먹는 시간조차 아까웠다. 그래서 요식업계에 종사하는 분들께는 정말 죄송한 말일 수 있겠지밥을 대체하는 알약이 개발되었으면 좋겠다는 망을 해 본 적이 있었다. 어찌 보면 효율적이지 않은가. 밥 먹는 시간을 줄이는 대신 나를 위한 계발이나 공부, 혹은 쌓인 업무 등에 그 시간을 투자하면 삶의 능률과 질을 훨씬 높일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쫄쫄 굶어 보기 전까진 누구나 그럴싸한 계획은 가지고 있다.


 물론 먹는 문제는 상당히 예민한 부분이다. 주변 지인 중에 맛집 탐방을 삶의 낙으로 여기시는 분도 여럿 있을 만큼 미각이 주는 행복 지수는 결코 무시해선 안 된다. 먹는 즐거움을 포기하고 약 하나로 식욕을 해소한다는 건 왠지 주유소에서 자동차 기름을 넣는 것처럼 기계적이고 비인간적으로 비치기도 한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광기에 사로잡힌 한 식약품 개발원이 자신의 천재성을 십분 발휘하여 단순히 포만감만 주는 알약이 아니라 특정 음식을 먹었다는 느낌이 남게 하는 알약을 개발해 본다면 어떨까.


'웰던으로 바싹 구운 강원도 횡성 한우의 안창살맛이 혀끝을 때리는 알약'

'구수한 된장찌개와 알싸한 총각김치가 메인인 시골집 백반맛이 입안에 맴도는 알약'

'맥도널드 1955 버거맛이 1시간 동안 입안에서 느끼하게 지속되는 알약'


 이런 알약의 개발로 인해 촉각이나 미각의 만족이 사라진 미래 사회를 상상하면 끔찍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감각의 상실보다 혼자서 밥을 먹는 세태가 더 위태롭다고 생각한다. 기계처럼 바쁘게 돌아가는 생활 속, 가뜩이나 만남의 자리를 마련하기가 어려워지고 있는데 작은 알약 덩어리 따위로 각자의 배고픔을 간편하게 대체해 버린다면 팽팽했던 관계의 끈이 조금씩 녹아내리고, 서로의 삶을 음미할 수 있는 기회마저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 '점심 알약 드실 시간입니다. 알약 하나씩 꿀꺽하고 다시 일합시다' 하는 장면은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누군가와 밥을 먹는다는 것은 흡사 각자의 삶과 시간이라는 색종이를 이리저리 오리고 붙여 근사한 작품을 만드는 일과 같다. 사소한 이야기부터 무거운 화제까지 각양각색의 소통이 오가며 서로의 삶의 방식과 트렌디한 정보를 알아가는 시간이 바로 밥 먹는 시간이 아닐까. 누군가와 함께 하는 식사 시간에는 아직 우리가 모르는 은밀하고 위대한 서정과 서사가 예고편처럼 숨어 있다. 혼자 밥 먹지 말고 같이 먹읍시다.  


 일전에 점심 식사 자리에서 한 동료 교사가 쓰메 소세끼 작가의 책을 읽어 보셨냐며 물어온 적이 있었다. 따로 소세끼 작가의 책을 읽어 본 적은 없다고 말하니 거기서 소통은 뚝 끊기고 말았다. 며칠이 지난 저녁 무렵, 침대 위에서 빈둥거리며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의 <<저녁 무렵에 면도하기>>라는 에세이집을 읽고 있었는데 거기에 소세끼 작가가 일전에 영어 선생님이었던 에피소드가 비밀스럽게 담겨 있었다. 다시 그 선생님과 점심을 함께 먹는 날이 온다면 소세끼 작가를 주제로 소통할 거리가 생긴 셈이다. 아마 이런 류의 대화가 오가지 않을까.


"선생님, 일전에 말씀하신 송아지, 아니 소세끼 씨가 실은 영어 선생님이었던 거 아셨어요?"

"네? 정말요? 저는 처음 알았어요. 어쩜 그리 똑똑하세요? 똑똑 박사님이세요?"

"별 거 없어요.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을 뿐입니다. 인류의 모든 지혜는 책에 담겨 있답니다."

"존경합니다. 선생님. 제 인생의 롤모델이세요."

"네, 앞으로도 지속가능한 존경 부탁드릴게요. 지금 선생님 앞에 있는 사람이 언젠가는 세상을 밝힐 대작가가 될 테니까요. 지금 미리 싸인 받아 놓으시겠어요?"

"... 국이 식습니다. 얼른 드세요."


최고로 맛있는 음식은 즐거운 식사 자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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