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까운 지인의 가정에 첫 아이가 선물처럼 찾아왔다. 아이를 낳아야 하는 시기가 딱히법으로 정해진 건 아니지만 아무튼 비교적 늦은 나이에 결혼을 해서 더 늦은 나이가 되어 그토록 고대하던 새 생명이 태어난 것이다. 정말 축하할 일인지라 지인에게 선물을 해야겠다고 맘먹었다. 나는 선택의 순간마다 햄릿 증후군이 불쑥 발현되는지라 나라는 멋진 남편을 잘 선택한 전력이 있는, 선택의 달인 아내에게 협조를구하기로 했다. 아내는 아들들이 막 태어났을 때의 기억을 더듬기 시작하더니 후다닥 선물을 골라 주었다.
그것은 세탁 세제와 유연제 그리고 젖병세정제가세트로 묶인 세제 3형제였다.통념의 영향 때문인지는 몰라도 세제류는 집들이용 선물이라는 고정관념이 박혀 있어서 아내의 선택은 약간의의외성을 내포하고 있었다.당연히 신생아용 바디슈트나 배냇저고리 같이 귀염뽀짝한옷 종류를 고를 거라 짐작했었는데 성의 없게 세제라니... 세제 3형제는 왠지 조잡한리본으로 포장되어있는듯한 느낌을 받았다.그래도 지혜로우신 아내님의 지엄하신 픽(pick)이었기 때문에 별다른 이견을 드러내지 않고 세제 3형제를지인에게 보냈다. 그리고 선물을 보냈다는 사실을 까마득히 잊고 살아갔다.
몇 달쯤 지났을까. 마침 선물을 건넸던 지인과 만날 자리가 있었다. 지인은 날 발견하자마자 지난 선물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저번에 보내 주신 선물, 아내가 상당히 좋아하더라고요. "
"네? 선물요? 아, 맞다. 그때 선물을 뭘 했더라?"
"젖병 세정제요. 옷 선물은 많이 들어왔는데 마침 젖병 세정제가 유일하게 들어와서 아내가 유용하게 잘 쓰고 있답니다. 꼭 감사하다고 전해달라 하네요."
"아, 그러셨구나. 제가 고른 게 아니라 아내가 골라준 거예요."
"어쩐지. 제 아내가 그러더라고요. 선물 보내신 분이 상당히 센스가 있으시다고."
"음... 사실은 제가 고른 겁니다. 제가 또 한 센스 하죠. 하하하."
"개수작 부리지 마시고요. 아내 분께 꼭 감사하다고 전해주세요."
"힝. 꼭 전할게요."
솔직히 내 마음에 들었던 선물은 개성적인 디자인의 바디슈트였지만 지인의아내분이 마음에 들어 했던 선물은 실용적인 젖병 세정제였다. 이 일상의 사건을 계기로 선물의 본질에 한 발짝 성큼 다가선 것 같았다. 선물이란내 기쁨이 아닌 상대방의 기쁨이었을 때 더욱 빛이 난다는 걸. 목마른 자에게 삶은 고구마를 줄 수 없고 국어 문제집을 필요로 하는 학생에게 수학 문제집을 사줄 수 없듯 선물을 할 때는 상대방의 상황과 정서, 취향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는 걸. 그리고 내 욕심보다는 상대방에 대한 공감과 배려가 모두를 행복에 이르게 한다는 걸. 몇 달 전에 선물을 고민할 때 아내랑 나눴던 희미한 대화의 조각들이 조각배를 타고 레테의 강을 막 건너왔다.아내는 세제 선물을 골라주며 이렇게 말했었지.
"응? 기껏 고른 선물이 세제야? 좋아하실까?"
"아마 옷 종류는 선물로 많이 들어올 거야. 내가 아들들 키워보니까 엄마들은 하루 종일 옷빨고젖병세척하느라 정신이 없어.세제류가 많이 필요할 테니 분명 좋아하실 거야."
그저 화려해 보이기만 했던 바디슈트에 정신이 팔린 나의 피상성이 쥐구멍을 향해 슬그머니 뒷걸음질 치더니 이내 구멍 속으로 몸을 감췄다.신생아는 금방 커버리니까 옷 같은 건 일정 시간이 지나면 입지도 못할 텐데, 왜 난 껍데기만 보고 그 안에 감춰진 알맹이는 보지 못했던 것일까. 그래, 선물은 상대방의 마음과 상황을 읽어야 하는 것이구나. 피상적 자아가 다신 내면 밖으로 튀어나오지 못하게 인사이트(insight, 통찰력)를 가득 부어 만든콘크리트로 못난 쥐구멍을단단히막아 버려야겠다.
이왕 선물 얘기가 나온 김에 나도 오랜만에 아내에게 선물을 해볼까? 아내가 가장 바라는 게 뭐였더라? 그래. 바로 나였지. 오늘퇴근길엔 딴 데로 새지 말고 곧장 집으로 들어가야겠다. 머리 위에왕리본이라도 달고 가면 반품 처리 당하겠지?
삶은 신이 내게 주신 선물입니다. 선물의 주인공은 당신이고요. 포장지가 뜯겨 있나요, 예쁘게 포장되어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