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아들은 내 우월한유전자를 잘 물려받은 덕에 키가 훤칠하고 머리 둘레도 남다르다.(아빠가 미안해, 아들. 하지만 머리 둘레가 크다고 해서 사는 데 큰 지장이 있는 건 아니란다. 가끔 모자가 꽉 낄 뿐.)뇌 용량이 커서 그런지 첫째 아들은 책 읽기를 좋아한다. 틈만 나면 과학만화책을 펼쳐 나름 진지하게 읽어 나가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어렸을 때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은, 한 세대를 뛰어넘은 기시감이대견스럽게찾아오곤 했다. 하루는 저녁 식사를 하던 중 첫째 아들이 보다가 만 책이 식탁에반찬인 듯 널브러져 있길래 무관심과 관심사이의감정을 손끝에 담아 몇 장을 훑듯이 읽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재미있었다. 다소 딱딱해 보이는 과학적 지식을 만화라는 형식을 통해 풀어놓아감칠맛 나는 국물을 후루룩 넘기는 것처럼 꽤 흡입력이 있었다.책 속에는 과학 상식에 대한 여러 챕터가 N첩 반상처럼 펼쳐져 있었고그중내 호기심의젓가락이 향한챕터는 '사람의 무게를 견딜 수 있는 종이컵 실험' 부분이었다.
종이컵 한 개를 세워 놓고 그 위에 사람이 올라가면 당연히 종이컵은 뭉개지지만, 여러 개의 종이컵을 일정한 간격과 형태로 세워 놓고 그 위에 책이나 판자를 올린 다음 사람이 올라가면 무너지지 않는다는, 문과형 사람들에겐 다소 낯설고 충격적인 내용의 실험이었다. 덧붙이자면종이컵 하나는 무게에서 비롯되는 압력을 고스란히 감당해야 하지만, 여러 개의 종이컵 위에 판자를 올려놓으면 압력이 N분의 1로 분산되면서 사람 무게까지 견뎌낼 수 있는 원리였다. 종이컵 1개가 버틸 수 있는 무게가 대략 21kg이라고 하니 종이컵 4개면 거의 성인 한 명쯤은 가뿐히 견뎌낼 수 있는 것이다. 종이컵에 이런 힘이 숨어 있었다니. 앞으론 다 쓴 일회용종이컵을무심결에찌그러뜨리는대신, 힘센 종이컵의 찬란한 N회용 인생을 응원하며 재활용 박스로 귀하게 에스코트해야겠다.
종이컵 실험에서 얻은 영감은 두 개의 이야기를 파생시켰다.
첫 번째 이야기. <슬픔의 분산>
"나 감당이 안 될 만큼 너무 슬퍼."
"슬픔이 무겁다는 거구나."
"응, 너무 무거워서 숨이 막힐 것 같아."
"슬픔이 가슴을 옥죄고 삶을 무겁게 억누를 때 그 당장의 무게를 견딜 수 있는 방법은 슬픔을 분산시키는 거야. 혼자서 묵묵히 견뎌내다 보면 시간이 슬픔의 무게를 점차 덜어내겠지만, 그 무게가 너무 무거워 당장 주저앉을 것 같으면 슬픔의 무게를 나눠 보는 건 어때?"
"누가 나의 슬픔을 함께 감당해 줄까?
"홀로 외로이 침잠하려고 하지 마. 가족이든 지인이든 너에게 손을 뻗어 줄 그 누군가는 분명 존재해. 당장 나도 지금 이 순간 너에게 손을 내밀고 있잖아. 내가 너의 슬픔을 지탱하는 종이컵이 되어 줄게. 혼자서 감당하려 하지 마. 나에게도 너의 슬픔을 나눠 줘. 한결 가벼워질 거야."
두 번째 이야기. <협력에서 오는 시너지>
"혼자서 삶을 책임지려다 보니 잘 안 되는 일도 많고 솔직히 힘이 부쳐."
"많이 힘들었구나. 설마 너 혼자서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다는 자만감에 빠져 있는 건 아니야?"
"아니, 자만감까지는 아닌데, 어찌 보면 무언가를 내 힘으로 이루어야 한다는 강박이나 책임의식일지도 몰라. 남의 도움 없이 말이야."
"세상의 주인공이 되고 싶어?"
"인생의 주인공은 나 아니야?"
"인생의 주인공은 당연히 너지. 그런데 말이야. 주인공을 빛내주는 조연이 없다면 혼자서는 결코 주인공이 될 수 없다는 사실 알아? 고작 종이컵 하나가 사람의 체중을 견디겠다고 호기롭게 나섰다간 처참하게 짜부라질 뿐이야."
"종이컵이라니? 계속 얘기해 봐."
"바이올린 한 대로 관현악단을 구성할 수 없고, 기타 하나로 밴드를꾸릴 수 없듯이 협력과 조화로움이 우리의 삶을 웅장하고 풍성하게 꾸며주는 거야."
"남에게 도움을 받아야 내가 존재할 수 있다는 의미야?"
"아니, 내 말은 단지 수동적으로 남의 도움만 바라는 게으름뱅이가 되란 의미는 아니야. 그저협력 속의 자립을 이야기하고 싶었을 뿐이야. 삶의 무게가 너무 무겁게 여겨진다면 누군가와 삶의 무게를 함께 짊어져 봐.삶이 훨씬 가벼워질 거야. 종이컵 여러 개가 모이면 그 위에 사람도세울 수 있는 시너지가 나온다고. 내가 기꺼이 힘이 되어 줄게. 혼자서 해보겠다고 고집부리는 건 용기가 아닌 만용일 수 있어. 때에 따라선 누군가에게 다가가 힘이 되어 달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해.폭풍우가 휘몰아치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두려움에 떨며 혼자 걷지는 마.넘어지지 않게 손을 붙잡고 걸어갈, 혹여 넘어져도 일으켜 세워 줄 존재가 네 곁에 있고, 너 역시 언젠간 그 누군가에게 손길이 되어줄 수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