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지란쓰고자 하는 내용을 종이에 빽빽하게 채워 넣는 것. 오밀조밀하게 붙어 있는 글자들이 새까맣게 보일 정도로 촘촘하게 쓰는 게 포인트다.
요즘 학교 현장에서는 학생들이진이 빠진손가락을 탈탈 털어가며 깜지 쓰는 장면을 도통 찾아보기 힘들다. 내가 학생 신분일 때만 해도 깜지 쓰기는 뭔가 잘못했을 때 내려지는 체벌의 일환이었다. 물론 학업 능력 향상을 위해 혹은 깜지집착병에 걸려 자발적으로 깜지를 썼던 학생들도 있었지만, 나를 포함해 대부분의 수동적인 학생들은 깜지 쓰기를 그다지 선호하진 않았다.차라리 그 순간 몇 대 맞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깜지 쓰기는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고된강제노역이었기 때문이다.때리고 욕하는 선생님보다깜지를여러 장 쓰게 하는 선생님이 더 공포스러웠다.
초코파이 하나랑 맞바꾼 학생의 깜지
강산이 몇 번 바뀌었고 이젠 나도 학생들에게 깜지 노역을 부과할 수 있는 지위에 오르게 되었다. 하지만내 기억의 숲 속에서이리저리 흩날리던 깜지라는 낙엽은 점차 퇴색하고 바스러져 새까만흙속에 파묻히고 있었다. 최근에이지성 작가님의 책을 읽다가 위대한 위인들의독서필사법이란 걸접했다. 천재라고 불리는 세종대왕이어렸을 때부터 백독백습했단역사적 사실은내게가벼운 쨉이 아닌 묵직한 카운터펀치를여러 방 먹였다. 박학다식했던세종대왕이 실은 독서와 필사로 완성된 후천적인 천재였다니.
사실깜지는 고통스러운 체벌이 아닌 인류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지혜롭고 탁월한 독서교육법이었던 것이다. 깜지에 대한 나만의패러다임이 180도로 급격하게 선회했다. 내기억의 흙속에 묻혀 있던 깜지는썩어버린 낙엽이 아니라싱그러이 움을 틔우고 있는 자그마한 꽃씨였던 것이다.
일기든 꿈노트든 책 필사든잡글이든 뭐라도 상관없으니 일단 쓰는 일에 경도되어 보자. 새하얀 백지 위에 내삶의 기록과 염원, 사유와 사색의 터럭들을 새까맣게 채워넣는 것이다.깜지 쓰기는손가락을 탈탈 털어가며 더 향기로워질 미래를 종이에그리는,사소하지만 필연적인 작업이다. 이제 그만 깜깜이 삶에서 벗어나 깜지 쓰는 깜냥을 쌓는 건 어떨까.
중지 손톱 옆에 박인 굳은살만큼 너의 지성에도 지혜와 통찰의 굳은살이 단단히 박여 있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