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식을 처음 시작한 날, 스마트폰의 증권사 어플은 한시도 꺼지지 않고 나와 눈을 마주치려고 했다. 내가 매수한 소량의 주식은 나의 머리채를 조용히, 집요하게 움켜쥐었다. 매수 시점으로부터 시작된 주가의 등락은 물이 가득찬 욕조 위에서 나의 머리를 흔들어댔다. 주가가 파란불을 띄며 하락할 때는 내 머리가 물 속으로 곤두박질쳐져 숨이 막혔고, 빨간불을 띄며 상승할 때는 물속에서 머리가 빠져나와 숨통이 트이는 안도감이 들었다. 일을 할 때에도, 길을 걸을 때에도, 사람과 대화를 할 때에도 나의 정신은 물고문을 받는 욕조 옆에 있었던 것이다. 그때부터였다. 나의 감각이 닳고 무뎌지기 시작한 것은.
주식을 통해 단기간에 큰 수익을 맛보게 되면 우리의 뇌는 작은 자극에 반응을 하지 않는다. 내가 생각하는 '작은 자극'은 우리의 일상과도 같다. 내가 생각하는 직장인의 '작은 자극'은 다음과 같다.
- 아침에 일어나서 물 한 잔을 들이킬 때의 시원함.
- 출근해서 일을 하며 사람들과 소통을 하고 자신의 업무에서 느끼는 성취감.
- 퇴근길 이어폰을 꼽고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걷을 때의 평화.
- 월급날 통장에 꽂힌 월급을 보며 평소보다 충성스러워지는 애사심.
- 주말이 오면 친구를 만나 다음날도 쉬는 날이어서 좋다며 수다를 떠는 여유.
- 이불을 빨고 누웠을때 은은한 섬유유연제 향에서 오는 포근함.
우리는 이처럼 일상 속에서 느끼는 '작은 자극'들로 삶을 채워나간다. 각각의 조각은 들쭉날쭉하지만 전체를 보면 멋진 작품이 되는 모자이크처럼 말이다. 하지만 도파민에 절여진 나의 뇌는 이러한 일상을 철저히 무시했다. 즉각적인 보상에만 침을 흘리도록 변화했던 것이다. 일례로 나는 그 당시 동료들에게 '휴대폰을 무척이나 좋아하는 MZ'라는 평판을 들었다. 다같이 한자리에 모여 이루어지는 회의 시간에도 틈틈히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모습 때문이었을 터이다. 친구 여러 명을 만나 시간을 보낼 때에도 나의 낯짝은 가짜 햇살을 표명하면서 끊임없이 머릿속으로 오늘의 주가는 무슨 색일지 물음표를 띄었다. 그러니 과연 '지금, 여기'에 집중할 수 있었을까?
나의 감정선을 좌우하고 그날 하루의 자존감을 재단한 것은 어플에 찍힌 숫자, 그것이 전부였다. 소소한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왔던 내게 하락장의 하루는 몹시 고통스러웠다. 평소 같았으면 분명히 화를 내지 않고 부드럽게 넘어갈 수 있는 일인데 피가 머리로 쏠리는 느낌이 들었다. 할 수 있는 일뿐이라고는 하염없이 파랗게 질려버린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것이었다. 이보다 비생산적으로 시간을 보낼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나의 시간'를 담보로 거래를 했던 것이었을까? 난 손에서 스마트폰을 놓지 못하였다. 모순적인 나 자신에게 구역질이 나면서도 또 손가락은 증권사 어플을 향하고 있었다. 마치, 내 존재 가치를 누군가 ‘파란불’ 하나로 평가해버린 듯한 날이었다. 세상이 무너진 것도, 누가 내게 상처를 준 것도 아닌데, 단지 숫자가 떨어졌다는 이유로 나는 하루 종일 무기력했고, 사람의 말조차 귀에 들어오지 않는, 무딘 사람이 되었다.
도박에서 돈만 잃는 것은 다행이다.
우리는 돈만 잃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 하루를 기분 좋게 보낼 것이냐, 무기력하게 보낼 것이냐'가
숫자 몇 개로 정해지는 삶.
그렇게 도박은 시간과 일상을 빼앗으며
우리를 서서히 침잠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