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된 공간의 의미적 변화
Hullet (구멍)
글그림 어이빈드 토세테르
A9Press
2014
안녕하세요, 그림책 여행자 여러분!
우리는 지금 그림책의 요소를 독특한 방식으로 담아낸 여행지들을 탐험하는 중입니다. 최근에는 그림 속 작은 디테일로 나타낸 캐릭터의 성격(도서관), 글을 통해서 되짚어가는 그림(내가 여기에 있어), 기법과 이야기의 상호작용(잘 가, 안녕!, 배고픈 애벌레) 등 그림책의 구성을 단단히 하며 독자의 재미를 올리는 방법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책 가운데 새끼손톱만 한 작은 구멍이 뻥 뚫려있습니다. 어이빈드 토세테르의 <Hullet 구멍>입니다.
주인공이 이사 온 집에 의문의 구멍이 뚫려있습니다. 이는 처음 표지에서 보이는 구멍으로 책을 전체를 관통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이 구멍은 책의 모든 페이지에 물리적으로 존재합니다. 구멍의 위치는 책의 중심으로 항상 동일하지만 작가가 그려낸 다양한 시점과 구도에 따라서 그 위치가 변한 것처럼 느껴집니다. 구멍은 어느 순간 덩그러니 나타난 의문스러운 빈칸이지만 주인공의 발이 걸려 넘어질 수도 있고 상자에 담을 수 있는 그림 속 존재이기도 합니다.
이 책은 특이하게도 펼친 페이지가 아닌 한 페이지 페이지 내용이 진행되어 그래픽 노벨 또는 칸 만화 같은 느낌을 줍니다. 이러한 전개 방식을 가지는 이유도 바로 구멍 때문이지요. 구멍은 한 페이지에 하나가 위치하여 작가의 의도하는 의미를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주인공의 구멍에 대한 반응으로 내용이 진행됩니다.
구멍이 상자에 담기고 나서도 책의 재미와 작가의 역량은 빛이 납니다. 구멍은 그림 안에서 동그라미로 표현될 수 있는 부분에 숨어있습니다. 이미 독자들은 구멍이 위치가 변하는 속성을 가졌다는 것을 인지하였기에, 내용상 구멍은 상자에 있지만 매 페이지마다 각기 다른 위치에 보이는 이 구멍이 상자에서 도망쳐 나온 구멍이 아닐까 생각하며 웃음이 납니다. 그리고 주인공이 상자를 열어 확인했을 땐 얌전히 있는 구멍을 보고 또 한 번 작가의 유머 감각에 무릎을 탁 칩니다.
마침내 연구실에 도착해 열어본 상자 안 정체불명의 구멍은 연구자의 손에서 실험체가 됩니다. 평소에는 이리저리 도망 다니기만 하던 구멍은 연구실에서는 구멍은 얌전히 구멍인 채로 있습니다.
연구소를 떠나 주인공이 집에 돌아올 때 구멍은 '달'이라는 한 가지 역할만을 맡고 있습니다. 연구실에 그 구멍이 남겨져있다는 의미를 보여주기 위함이라고 보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주인공이 집에 돌아왔을 때 처음 발견된 위치에 구멍이 다시 머물러 있는 채로 끝납니다. 주인공은 인지를 하지 못하지만 독자들에게는 보이는 이 구멍은 내용의 연속성이자, 책의 다음을 자유롭게 상상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둡니다.
책에 뚫려있는 구멍을 재밌는 그림책의 요소로 전환시킨 어이빈드 토세테르의 <Hullet>였습니다. 그냥 읽어도 재밌지만 이 그림책 속 각 구멍의 의미와 역할 그리고 그것을 표현하기 위한 작가의 상상력을 읽을 수 있는 시간이셨길 바랍니다.
오늘의 여행은 어떠셨나요? 오늘 준비한 여행은 여기까지입니다. 남은 주말 즐거운 시간 보내시길 바라며, 저는 다음 주 일요일에 또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