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폐업신고
내 딸은 혹시 천재가 아닐까?
모든 부모에게는 불치병이 찾아온다. "우리 애가 혹시 천재 아닐까?" 하는 착각. 나에게도 그 순간이 왔다. 평소 취미로 피아노를 치던 나는, 문득 딸에게도 음악적 재능이 흐르고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 부풀었다. '절대음감'. 음악 하는 사람들에게는 꿈의 능력. 그래, 내 딸을 절대음감의 소유자로 키워보자.
흔히 절대음감은 타고난 천재들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하지만, 일본의 한 연구 결과는 나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 일본의 음악 심리학자 에구치 박사의 실험에 따르면, 절대음감은 유전자가 아니라 '결정적 시기의 훈련'으로 만들어진다고 한다. 만 2세부터 6세 사이의 아이들에게 화음과 색깔을 매칭시키는 훈련을 했더니, 무려 90% 이상의 아이들이 절대음감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단, 이 시기가 지나면 습득률은 현저히 떨어진다. 즉, 지금이 아니면 평생 가질 수 없는 능력이라는 소리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나는 눈이 뒤집혔다. '이건 기회다!' 나는 야심 찬 프로젝트를 기획했다.
이름하여 '아빠표 공감각적 절대음감 훈련'. 거창한 이름만큼이나 준비물도 철저했다. 나는 색종이로 정성스럽게 학을 접었다.
아빠의 야심 찬 커리큘럼
나의 교수법은 에구치 박사의 이론대로 간단하면서도 직관적이었다. 소리를 색깔로 인지하게 하는 것.
C코드 (도미솔) = 분홍색 종이학
G코드 (솔시레) = 보라색 종이학
E코드 (미솔#시) = 파란색 종이학
"은아, 아빠가 '띠링~' 하고 치면 이게 무슨 색깔 학인지 맞히는 거야. 알았지?" "응!"
초반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C코드와 G코드, 딱 두 개만 가지고 훈련할 때는 딸이 곧잘 맞혔다. "띠링~" (C코드) "분홍색!" "딩동댕! 우와, 우리 딸 진짜 천재 아냐?"
나는 환호했고, 딸은 으쓱해했다. 내 귓가엔 벌써 쇼팽 콩쿠르에서 우승하는 딸의 연주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모차르트도 이렇게 시작했겠지. 그렇게 두 가지 코드에 익숙해지길 일주일. 나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바로 다음 단계인 'E코드(파란색)'를 투입했다.
3화음의 비극, 그리고 6개월 만의 폐업
하지만 욕심이 화를 불렀다. 선택지가 3개가 되자 딸의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띠링~" (E코드) "음... 보라색?" "땡! 파란색이지~ 다시 들어봐." "띠링~" "음... 분홍색?"
틀리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딸의 표정은 급격히 어두워졌다. 처음엔 놀이로 시작했지만, 아빠의 기대 섞인 눈빛, 그리고 틀렸을 때의 그 미묘한 실망감을 아이는 기가 막히게 감지했다.
'그래, 천천히 하면 되지. 아직 어리니까.'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에구치 박사도 꾸준함이 생명이라고 했으니까. 하지만 그것은 나만의 착각이었다. 한 달이 지나고, 반년이 지나도 딸은 E코드 앞에서 고개만 갸웃거릴 뿐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딸은 피아노를 싫어하게 되었다. "안 해!" 딸은 외치며 피아노 건반을 주먹으로 '쾅쾅' 내리치기 시작했다. 그것은 연주가 아니라 분노의 타건이었다. 아름다운 화음은 온데간데없고, 불협화음만이 거실을 가득 채웠다.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건가. 아이한테, 음악을 '즐거움'이 아닌 '맞히고 틀리는 시험'으로 만들고 있었구나. 아이는 그저 아빠랑 놀고 싶었을 뿐인데, 나는 아이를 내 욕심의 틀에 끼워 맞추려 하고 있었다. 6개월간 내가 한 짓은 교육이 아니라 고문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 자리에서 즉시 '폐업 선언'을 했다. "그래! 공부는 무슨 공부야. 그냥 춤이나 추자!" 나는 피아노 뚜껑을 덮지 않고, 대신 신나는 댄스곡을 연주했다. 딸은 언제 짜증을 냈냐는 듯 엉덩이를 흔들며 춤을 췄다. 그래, 이게 진짜 음악이지.
피아노 학원은 나중에 가는 걸로
나의 첫 번째 피아노 교실은 그렇게 씁쓸하게 문을 닫았다. 절대음감 훈련용 종이학들은 딸의 소꿉놀이 소품이 되어 장렬히 전사했다.
이 실패를 통해 나는 중요한 사실 하나를 배웠다. 교육은 부모가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흥미를 보일 때 뒤에서 살짝 밀어주는 것이라는 것을. 그리고 내 딸은 아직 피아노를 '배우기'보다는, 건반을 두드리며 스트레스를 푸는 '타격감 좋은 장난감'으로 생각한다는 것을.
언젠가 딸이 먼저 "아빠, 나 피아노 배우고 싶어"라고 말하는 날이 올까? 그때가 오면 다시 문을 열겠지만, 당분간 우리 집 피아노는 그저 값비싼 가구이자, 가끔 아빠가 기분 낼 때 치는 BGM 머신으로 남겨두기로 했다.
절대음감은 없어도 괜찮다. 네가 웃을 때 내는 그 '깔깔' 소리가, 아빠에겐 세상 어떤 화음보다 완벽한 음악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