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의 매력으로
어른이 되어서야 비로소 알게 된 세계
고백하건대, 딸이 태어나기 전까지 내 인생에서 '그림책'은 존재하지 않는 장르였다. 글씨는 적고 그림만 많은 책. 그건 아이들이나 보는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30개월간 가정보육을 하며 딸의 손을 잡고 도서관 문지방이 닳도록 드나들면서, 나는 내가 얼마나 오만했는지 깨달았다.
도서관 어린이 열람실은 나에게 보물창고였다. 그곳에서 나는 뒤늦게 수많은 거장들을 만났다. 상상력의 끝판왕 앤서니 브라운, 아이들의 마음을 기가 막히게 훔쳐내는 요시타케 신스케, 특유의 서정성으로 마음을 울리는 사카이 고마코, 그리고 한국 그림책의 자존심 백희나까지.
그들은 그림책 작가가 아니었다. 철학자이자, 예술가였다.
도서관, 아저씨의 눈물 버튼
때로는 30대 중반의 아저씨가 어린이 열람실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훌쩍거리는, 다소 민망한 상황이 연출되기도 했다.
특히 사카이 고마코의 《눈 내린 날》을 읽었을 때가 그랬다. 눈이 너무 많이 와서 유치원 버스도, 장 보러 가는 엄마도 멈춰버린 날. 토끼 아이는 베란다에 나가 눈 덮인 세상을 바라본다. "아무도 밟지 않은 눈이다." 그리고 밤이 되어 눈이 그치자, 아이는 아무도 없는 눈밭으로 뛰어나가 뽀드득 소리를 내며 걷는다. 그 단순한 이야기와 그림이, 이상하게 내 마음을 후벼 팠다. 어린 시절, 시골집 마당에 소복이 쌓인 눈을 보며 느꼈던 그 고요함과 설렘, 그리고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그 시절의 내가 떠올라 코끝이 찡해졌다.
앤서니 브라운의 책들은 또 어떤가. 고릴라 아빠가 등장하는 그의 책들을 보며, 무뚝뚝해 보이지만 사실은 누구보다 따뜻했던 나의 아버지, 그리고 지금 아빠가 된 나의 모습을 투영하며 한참을 생각에 잠기곤 했다. 딸에게 읽어주려고 펼친 책에서, 오히려 내가 위로받고 치유받고 있었다.
책 밖으로 튀어나온 이야기들
딸이 자라 공연을 볼 수 있는 나이가 되자, 우리의 데이트 코스는 도서관에서 공연장으로 확장되었다. 특히 딸이 열광하는 백희나 작가의 작품들은 놓칠 수 없었다.
《장수탕 선녀님》 뮤지컬 공연이 있다는 소식에 우리는 주저 없이 서울행 기차에 올랐다. 지방에 사는 우리에게 서울 나들이는 큰 결심이었지만, 공연은 그 수고가 아깝지 않을 만큼 훌륭했다. 요구르트를 빨아 먹는 선녀님의 디테일이라니! 어른인 내가 봐도 감탄이 나올 정도의 퀄리티였다.
이어서 관람한 《알사탕》은 우리 가족의 '인생작'이 되었다. 뮤지컬로 두 번이나 보고, 극장판 애니메이션까지 챙겨 봤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마음의 소리를 듣게 해주는 알사탕. 그 이야기를 통해 나는 딸의 마음을, 그리고 곁에 있는 아내의 마음을 다시 한번 헤아려보게 되었다.
우리는 여전히 그림책을 읽는다
어느덧 딸은 훌쩍 자라 혼자서 글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더 이상 아빠가 무릎에 앉혀놓고 한 글자 한 글자 읽어주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도서관에 가면 각자 읽고 싶은 그림책을 잔뜩 빌려와 나란히 앉는다.
딸은 딸대로 그림 속의 재미를 찾고, 나는 나대로 그림 속의 철학을 읽는다. 같은 책을 보고 서로 다른 감동을 느낀 뒤, "아빠, 이 장면 진짜 웃기지 않아?" 하고 대화를 나눈다.
그림책은 아이가 글을 떼면 졸업하는 책이 아니었다. 0세부터 100세까지, 전 세대가 함께 공유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예술 작품이었다. 딸 덕분에 알게 된 이 다정하고 따뜻한 세계에서, 나는 오늘도 아이처럼 책장을 넘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