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편 17 : 아빠의 추억 소환! 마법소녀 육아법

by CㅇSMㅇS

소년들의 비밀, 그리고 아빠의 커밍아웃

90년대를 살아낸 소년들에게는 절대 말할 수 없는 비밀이 하나 있었다. 학교에서는 "어제 손오공이 초사이어인 되는 거 봤냐?", "어제 슬램덩크 봤냐? 왼손은 거들 뿐" 하며 소년만화 이야기를 침 튀기며 했다. 하지만 방과 후, 그들이 헐레벌떡 집으로 뛰어간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바로 TV 앞에서 변신 소녀들을 영접하기 위해서였다.

천사소녀 네티, 카드캡터 체리, 세일러문, 달빛천사.

화려한 변신 장면과 정의를 구현하는 소녀들의 모습에 소년들의 가슴은 웅장해졌다. 나 역시 그 '샤이 마법소녀 팬' 중 한 명이었다.

다행히 나의 아내 역시 나와 동갑내기다. 우리는 이 위대한 명작들의 추억을 공유하고 있었다.

"여보, 우리 서은이한테도 이 명작들을 보여줘야 하지 않을까?" "그치? 요즘 만화도 좋지만, 그때 그 감성은 못 따라오지." 아내의 동의(혹은 방조) 하에, 나는 본격적으로 '아빠표 마법소녀 조기교육'을 시작했다.


전설의 시작, 카드캡터 체리

나의 첫 번째 픽은 단연코 카드캡터 체리였다. 아름다운 작화, 탄탄한 스토리, 그리고 무엇보다 "틀림없이, 잘 될 거야!"라는 긍정적인 메시지까지. 이것은 단순한 만화가 아니라 철학서에 가까웠다.

나는 딸에게 하루에 딱 한 편씩만 보여주었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딸은 순식간에 체리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아빠, 봉인 해제!"

딸은 밥 숟가락을 마법봉처럼 휘둘렀다. 우리는 TV판 전편을 몇 달에 걸쳐 완주하고, 극장판까지 달렸다. 그것도 모자라 딸은 "아빠, 처음부터 다시 볼래!"를 외치며 2회차 정주행을 시작했다. 역시 명작은 시대를 타지 않는다. 내 딸이 나와 같은 장면에서 웃고 감동하는 모습을 보는 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짜릿함이었다.


소녀들이 가르쳐준 용기

이어서 우리는 달빛천사와 천사소녀 네티까지 섭렵했다. 나도 옆에 앉아 같이 보곤 했는데, 솔직히 고백하자면 아이보다 내가 더 몰입했다. 어릴 땐 그저 예뻐서 봤던 장면들이, 어른이 되어 다시 보니 전혀 다르게 다가왔다.

마법소녀들은 언제나 수많은 역경에 부딪힌다. 악당은 강하고, 세상은 잔혹하다. 하지만 그녀들은 주저앉아 울기만 하지 않는다. 화려한 드레스와 마법봉은 거들 뿐, 그녀들의 진짜 무기는 '절대 포기하지 않는 마음'과 '타인을 사랑하는 용기'였다.

"은아, 체리 언니 봐봐. 무서워도 도망 안 가지? 친구들을 지켜주려고 용기를 내는 거야."

나는 은근슬쩍 숟가락을 얹어 교육적인 멘트를 날렸다. 딸은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소녀는 아빠의 잔소리보다 백 배는 더 훌륭한 도덕 선생님이었다.


함께 흘린 눈물

물론 마냥 즐겁기만 한 건 아니었다. 달빛천사처럼 슬픈 서사가 있는 작품을 볼 때면 거실은 눈물바다가 되었다. 주인공이 역경을 딛고 노래하는 슬픈 장면에서, 딸은 입을 삐죽거리더니 이내 펑펑 울음을 터뜨렸다. 그 작은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모습이 어찌나 귀엽고 짠하던지. 나는 딸을 꼭 안고 등을 토닥여주었다.

"은아, 너무 슬퍼? 루나(주인공)가 불쌍해서 그래?"

사실, 나도 위기였다. 코끝이 찡해지고 눈물샘이 촉촉해져 있었다. 다 큰 아저씨가 만화 보면서 운다고 놀림받을까 봐, 나는 천장을 바라보며 필사적으로 눈물을 참았다.

'크흠, 먼지가 들어갔나...' 딸을 달래주는 척했지만, 사실은 나 자신을 달래고 있었다.


언젠가 함께 영화를 볼 날을 기다리며

그렇게 우리는 매일 밤, 마법의 세계로 여행을 떠난다. 함께 주제가를 따라 부르고, 주문을 외우며, 악당을 물리치고 기뻐한다. 딸은 마법소녀들을 보며 꿈과 용기를 키우고, 나는 딸을 보며 잃어버렸던 동심을 되찾는다.

언젠가 딸이 더 자라면, 마법소녀를 졸업하고 나와 함께 쇼생크 탈출이나 인생은 아름다워 같은 명작 영화를 보는 날도 오겠지? 그때도 우리는 나란히 앉아 팝콘을 먹으며, 같은 장면에서 울고 웃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딸에게 말해줄 것이다.

"은아, 세상이 힘들 때면 기억해. 틀림없이, 잘 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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