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편 19 : 아빠들의 수강신청 전쟁

by CㅇSMㅇS

아이돌 티켓팅? 아니, 육아 프로그램 광클!

나의 육아휴직 생활을 지탱해 준 8할은 '정보력'과 '스피드'였다. 사람들은 묻는다. "하루 종일 애랑 둘이 있으면 뭐 하고 놀아요? 심심하지 않아요?" 천만의 말씀. 나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바로 지자체와 가족센터에서 주관하는 각종 체험 프로그램을 사수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 프로그램들은 그야말로 '가성비 끝판왕'이다. 재료비만 내거나 심지어 무료인 경우도 많은데, 퀄리티는 백화점 문화센터 뺨친다. 문제는 나만 이걸 아는 게 아니라는 점. 경쟁률이 흡사 BTS 콘서트 티켓팅이나 대학교 인기 교양강좌 수강신청 급이다.

나는 수시로 각 지자체 육아종합지원센터와 가족센터 홈페이지를 '새로고침'하며 일정을 파악했다. 접수 시작 5분 전, 스마트폰 알람이 울리면 비장하게 손가락을 풀었다. '이번 주말, 딸기 체험은 내 손에 달렸다.' 59분 58초, 59초, 땡! 광클! "예쓰! 접수 완료!"


블루베리부터 도장 만들기까지, 체험의 뷔페

나의 이 피나는 '클릭질' 덕분에 딸과 나의 주말은 언제나 풍성했다. 봄에는 딸기 농장에서 달콤한 딸기를 따 먹으며 입 주변이 빨개졌고, 여름에는 블루베리 농장에서 보랏빛 추억을 만들었다. 실내 체육관을 통째로 빌린 듯한 유아 체육 프로그램에서 땀을 뻘뻘 흘리기도 했고, 앞치마를 두르고 피자, 쿠키, 케이크를 만들며 꼬마 요리사가 되어보기도 했다. 심지어 돌을 깎아 우리만의 도장을 만드는 고난이도 체험까지.

집에서 단둘이 있었다면 유튜브나 보여주며 때웠을 시간들이, 내 손가락의 노력 덕분에 밀도 높은 경험으로 채워졌다. 딸이 고사리 같은 손으로 직접 만든 쿠키를 내 입에 넣어줄 때의 그 맛은, 미슐랭 3스타 레스토랑의 디저트보다 달콤했다.


외로운 아빠들의 쉼터, '100인의 아빠단'

그중에서도 내 육아 생활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100인의 아빠단'이었다. 평소 놀이터나 키즈카페에 가면 온통 엄마들뿐이라 나는 늘 이방인처럼 쭈뼛거려야 했다. 하지만 이곳은 달랐다. 여기를 봐도 아빠, 저기를 봐도 아빠. 100명이 넘는 '아저씨'들이 아이 손을 잡고 모여 있는 풍경은 그 자체로 웅장했다.

우리는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전우애가 있었다. 아이가 떼를 쓰면 난감해하는 표정, 한 손에는 짐을 들고 한 손으로는 아이를 케어하는 저 익숙한 폼. '아, 나만 이렇게 힘든 게 아니구나. 저 아빠도 오늘 하루를 버텨내고 있구나.' 서로 눈인사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거대한 위로가 되었다.


아빠의 위엄을 세워준 '등골핑' 퀴즈

어느 날, '100인의 아빠단' 행사 도중 사회자가 돌발 퀴즈를 냈다.

"자, 이번엔 딸 가진 아빠들을 위한 고난이도 문제입니다! 성공하시면 푸짐한 과자 세트 드립니다!"

나는 본능적으로 자세를 고쳐 앉았다.

"우리 아빠들의 지갑을 털어가는 파산핑, 아니 <티니핑> 캐릭터 이름을 5초 안에 5개 이상 대시오! 시~작!"

주변 아빠들이 웅성거렸다. "어? 그게 뭐였더라?", "다 핑크색이라 똑같이 생겼는데?" 멘붕에 빠진 아빠들 사이에서, 나는 번개같이 손을 들었다. 지난 수개월간 딸 옆에서 강제로 티니핑을 시청하며 세뇌당한 내 뇌세포가 빛을 발할 순간이었다.

"네! 저기 아버님!"

마이크가 넘어오자마자 나는 숨도 쉬지 않고 속사포 랩을 쏟아냈다.

"하츄핑! 바로핑! 아자핑! 차차핑! 라라핑!"

정확히 3초 컷. 좌중에는 정적과 함께 감탄이 흘렀다.

"정답입니다! 와, 아버님 평소에 아이랑 정말 많이 놀아주시나 봐요!"

사회자의 극찬과 함께 내 품에는 커다란 과자 선물 세트가 안겼다. 딸이 눈을 반짝이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우와! 아빠 최고! 티니핑 다 알아!" 그 순간만큼은 내가 세상에서 제일 똑똑하고 멋진 아빠였다. (물론 딸은 내 지식보다 과자 상자에 더 감동한 눈치였지만.)


아빠들이여, 광클하라!

육아는 정보전이고, 아빠는 외롭지 않아야 한다. 지금도 방구석에서 '이번 주말엔 또 뭐 하지' 고민하며 머리를 쥐어뜯는 아빠들이여. 당장 지자체 홈페이지를 켜라. 그리고 알람을 맞춰라. 그곳에 가면 우리를 반겨주는 수많은 프로그램과, 티니핑 이름을 외우며 동지애를 나누는 아빠들이 기다리고 있다.

혼자 하면 육아는 '노동'이지만, 함께 하면 '축제'가 된다. 오늘도 나는 딸과의 즐거운 주말을 위해, 비장한 표정으로 마우스를 클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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