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하우 수용소의 비극
뮌헨의 타이어 맛 젤리
어젯밤 급하게 공부를 좀 해보니 독일 시내, 특히 뮌헨 같은 환경 보호 구역에 차를 끌고 들어가려면 환경 스티커(Umweltplakette)가 필수란다. 안 붙이고 걸리면 벌금 폭탄이라길래, 가는 길에 교통공사 같은 관공서에 들러 7유로를 주고 샀다. 친절하게 파킹 디스크도 하나 얻었다. 가만 보니 여기 직원들은 마우스도 없이 노트북 터치패드만 슥슥 문지르며 업무를 보더라. 한국에서 마우스 압수하고 저렇게 일하라고 하면 당장 노조에서 들고일어날 텐데, 옆에서 보는 내 속이 다 답답했다. 한국에서는 상상도 못 할 비효율성인지 효율성인지 모를 독일 관공서 체험이 꽤 신선했다.
본격적으로 뮌헨 시내를 구경하려는데 온통 공사판이다. 비수기라 관광객 없을 때다 싶어 온 동네 땅을 파뒤집는 모양이다. 마리엔 광장 시청사 앞에서 낮 12시에 그 유명하다는 인형극을 구경했는데, 음, 역시나 별거 없다. 유럽 인형극에 대한 내 기대치는 이미 지하를 뚫고 맨틀까지 내려갔다.
다음은 아이의 최고 기대주였던 하리보 젤리 가게. 별의별 맛이 다 있다. 아이는 달콤한 마시멜로 맛을 골랐고, 나는 호기심에 새까만 타이어 맛이 궁금해서 사봤다. 한 입 씹는 순간 직감했다. 돈 날렸다. 유럽인들이 환장한다는 감초 맛 젤리라는데, 내 입맛엔 진짜 미쉐린 폐타이어를 질겅질겅 씹어먹는 맛이다. 도저히 못 먹겠어서 포기. 현금이 떨어져서 길가 ATM을 다 쑤시고 다녔는데 죄다 출금 실패다. 결국 독일판 올리브영 dm에 들러서 가족들 선물용 발포 비타민만 카드로 긁었다. 시내 주차장 요금 정산하는데 16유로가 찍혔다. 살인적인 스위스보단 낫지만 그래도 독일 주차비 참 맵다.
다하우 강제 수용소와 역사의 무게
발걸음을 돌려 다하우 강제 수용소로 향했다. 내일 다시 오기엔 동선이 꼬일 것 같아 오늘 일정에 무리해서 넣었지만, 이곳은 피곤함을 핑계로 미룰 수 없는 곳이었다. 다하우 수용소는 나치가 세운 최초의 강제 수용소이자, 이후 유럽 전역에 세워진 수많은 절멸 수용소들의 끔찍한 롤모델이 된 장소다.
수용소는 생각보다 훨씬 더 거대하고 삭막했다. 끝없이 펼쳐진 수용소 터를 걷는 내내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특히 가스실과 소각로를 직접 눈으로 마주했을 때의 충격과 참담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수많은 인간이 철저하고 계획적으로, 그리고 너무나도 잔혹하게 학살당한 현장에 서 있으니 절로 숙연해졌다. 인간의 맹목적인 증오가 얼마나 끔찍한 비극을 초래하는지, 그리고 역사의 무게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동시에 자신들의 가장 부끄럽고 참혹한 흑역사를 덮어두지 않고, 이렇게 샅샅이 보존하여 후세에 남긴 독일의 태도는 시사하는 바가 컸다. 철저한 반성과 기억만이 같은 비극을 반복하지 않는 유일한 길임을 그들은 알고 있는 듯했다. 한없이 무거워진 마음을 안고 숙소로 돌아오니 아내가 정성껏 저녁을 차려두었다. 조용히 식사를 하며, 오늘 눈에 담은 비극의 현장과 지금 누리고 있는 평범한 일상의 소중함에 대해 깊이 생각하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만 37세 생일과 진격의 뇌르틀링겐
오늘은 내 생일이다. 만 37세. 이제 빼도 박도 못하는 30대 후반 아저씨다. 한국 나이로 치면 내후년이면 마흔이다. 나도 나이 참 많이 먹었다. 세월 참 무섭다. 어느새 40을 바라보는 애 아빠가 되었다니. 끙.
어제 무리한 탓에 오늘은 아주 가벼운 일정으로 뇌르틀링겐에 도착했다. 넓은 주차장에 차를 대고 들어가니 눈앞에 진짜 거대한 방벽이 나타났다. 내가 진짜 재밌게 봤던 애니메이션 진격의 거인의 배경 모티브가 된 바로 그 도시다. 아쉽게도 메인 전망대는 공사 중이었지만, 장벽을 따라 걸으니 곳곳에 진격의 거인 관련 낙서도 많고 아주 재미난 곳이었다. 마음 같아선 조사병단처럼 심장을 바쳐라! 외치고 싶었지만, 내 심장은 이미 오르막길을 걷느라 터질 것 같았다. 한국 돌아가면 진격의 거인 1기부터 다시 정주행해야겠다. 다른 전망대에 올라가서 도시 조망을 해봤는데, 전체 동그란 모습을 한눈에 담기엔 살짝 아쉬웠지만 그래도 만족.
숙소는 생각보다 멀리, 슈투트가르트 쪽에 더 가까웠다. 가는 길에 리들 마트에 들러 장을 보고 도착했는데, 숙소가 꽤 마음에 든다. 중국 가전인 하이얼 세탁기인데 건조 기능까지 있어서 밀린 빨래를 싹 돌렸다. 저녁엔 아내가 생일 축하 노래도 불러주고 시원하게 독일 맥주도 한 잔 들이켰다. 크윽, 이 맛이지. 기특한 우리 아이가 주는 생일 선물은 아빠랑 같이 자기란다. 세상에서 제일 예쁜 딸 덕분에 며칠간 쌓인 운전 피로가 싹 풀린다. 감동에 젖어있는데 아내가 다급하게 오더니 루브르 박물관이랑 베르사유 궁전 예매를 해야 한다며 파리 숙소 토론을 시작했다. 생일날 밤에도 여행 행정 업무는 멈추지 않는다. 으, 피곤하다!
돈 받는 화장실과 벤츠 박물관
슈투트가르트 시내로 향했다. 시내로 들어오니 역시나 차가 꽉 막히고, 주차장 요금은 1시간에 무려 4유로다. 길을 잘못 들었나 싶을 정도로 비싸서 뒷목이 뻐근해졌다.
가장 끔찍한 건 화장실이었다. 급해서 무료 화장실을 찾았는데 하필 여자 화장실 문이 고장 나 막혀서 못 들어가는 상황. 기차역이나 백화점 화장실은 전부 돈을 내고 들어가야 한단다. 1유로 안 내면 방광이 터져도 문을 안 열어주는 야박한 유럽 자본주의 시스템. 생리 현상까지 돈으로 철저히 통제하다니, 화장실 인심만큼은 진짜 한국, 일본, 중국이 세계 최고다.
지나가다 우연히 아시아 마트를 발견해서 들어갔는데 중국인이 운영하는 곳 같았다. 과거 중국 보저우 파견 근무 시절의 향수를 느끼며 구경하다가, 아이가 먹을 우동이랑 고래밥을 샀다. 독일 한복판에서 만나는 고래밥이라니 반갑고 재밌다.
광장을 구경하고 그냥 가기 아쉬워서 벤츠 박물관에 방문했다. 별 기대 안 했는데 꽤 볼만했다. 특히 번쩍거리는 클래식 카들의 자태가 정말 멋졌다. 자동차에 별 관심 없는 나도 이 정도인데, 남자아이를 데려왔으면 아주 환장하고 안 나간다고 바닥에 누워 떼를 썼을지도 모른다. 딸이라서 천만다행이다. 지갑 지켰다.
눈 호강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는데 차도 막히고 꽤 멀었다. 하지만 도착한 숙소는 이번 여행에서 묵은 에어비앤비 중 단연 최고였다. 그저 예쁘게 꾸며놓은 게 아니라, 진짜 누군가 거주하는 사람 냄새나는 훌륭한 집이었다. 분위기 좋게 독일 와인도 한 잔 맛보며 하루를 닫았다.
가만 보니 오늘로 세계 일주 딱 40일째 되는 날이다. 80일 일정의 정확히 절반을 왔다. 반환점을 돌고 나니, 내일부터는 서서히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이 가까워진다는 생각에 마음이 한결 편안해진다. 지금까지 우리 가족 아무도 다친 사람도 없고 좋은 추억 많이 만들었다. 후반전도 잘 달려보자.
드디어 세상에 나왔습니다! 『나는 88년생 지방직 공무원입니다』 출간
모두가 "지방은 끝났다", "월급만으론 답이 없다"고 말할 때, 저는 이 변두리 소도시를 저만의 든든한 '자본주의 베이스캠프'로 개조했습니다. 전 세계 자산에 투자하고, 30개월의 아빠 육아휴직을 온전히 누리며, 80일간의 가족 세계일주를 완주해 낸 현실적인 실전 생존기입니다.
남들이 정해놓은 길 대신 나만의 궤도를 유쾌하게 설계하고 싶은 분들께, 이 책이 팍팍한 일상의 확실한 돌파구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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