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다가 저자 의도를 읽고 고개를 끄덕이다가 나의 것으로 문장을 받아들인다. 그래 그럴 수 있어. 맞는 말이야. 수긍하며 공감할 때가 많다. 저자의 말을 내 말로 바꾸다 제법 그럴싸한 문장을 만들면 기분이 업되기도 한다. 그러다 어느 날 에이 나랑 안 맞아 하고 반항하는 날이 있다. 어제가 그랬다. 쇼펜하우어의 책을 읽다가 괜한 용심이 났다.
1) 원문장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 강용수
'가장 낮은 단계의 욕망이 성욕이라면 가장 높은 단계의 욕망이 사유다.
욕망의 덩어리인 인간이 이 양극단의 욕망을 잘 통제하여 균형을 이루는 것이
행복에 이르는 길이다'.
평범한 문장하나가 툭하고 걸린다. 문장공부 해야하는데 급하게 잡은 문장이라 그런가?
2) 나의 문장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데카르트의 말이 떠오르는 건 주입식 교육의 병폐다. 문제가 나오면 반사적으로 답을 말해야 함을 교육 받았다. 바보 같다.
1+1=2 라는 계산도 달리 생각할 여지를 주지 않음으로 생각을 왜곡시키고 있다. 1+1=0.9 혹은 0.5라고 가정해 보자.. 이런 질문을 한다든지? 왜? 정답이 2이어야 하는지? 2가 되어야 하는 전제조건은 뭐지? 생각을 방해하는 것들을 전혀 배제한 주입식에 염증을 느낀다.
‘생각한다’와 존재한다‘라는 말이 붙어 있어야 하는 까닭은 뭘까? 생각과 존재.
데카르트는 어떤 전제조건으로 이런 말을 했지? 생각과 존재를 통해 실존을 이야기하는 건가? 아~ 까칠해지는 시간.
막걸리 탓이다. 냉장고에 반병 남은 막걸리를 꺼냈다. 논문 보느라 나랑 안 놀아주는 남편은 아침부터 내내 공부 중이다. 젠장~ 마누라 거실서 존재함이 안중에도 없다. 막걸리를 마시든 말든 자기 일에 빠져있다. 그는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다. 맘에서 휙~ 던지고 존재하는 막걸리와 뜨거운 키스로 캬~ 존재감을 느낀다.
데카르트가 뭐라 했건 상관없다. 욕망 덩어리 성욕이 해결되지 못함은 낮은 단계라 했는데 그 때문만은 아니다. 논문에 밀린 마누라는 하루 종일 혼자 삭힌 시간들이 허술했음을 다른 탓으로 돌린다. 아무래도 낮은 단계가 내내 걸렸다. 사유의 욕망과 본능의 균형 그런 건 없다. 균형 안 맞는 시소를 타고 삐거덕 소리가 나도 행복하다. '수리수리 마수리 나는 행복하다' 주문을 걸면 행복한 것이다.
© tingeyinjurylawfirm, 출처 Unsplash
근데 용심이 왜 났지?
데카르트의 말때문인가? 쇼팬하우어의 말 때문인가? 막걸리 때문인가? 서방때문인가?
자고나니 이런저런 생각이 새롭게 세팅된다. 새벽 노트북 다시 켤땐 어제의 그 기분 그맘이 아니다. 생각도 재부팅된다. 그래 그렇게 살아야지 까칠한 맘 이어가는 어리석음은 존재의 이유에 태클걸 뿐이야. 용심 부리지 않는 날...화이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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