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장

이름이 없던 시절

by 이상

고통 속에 닫힌 마음, 말하지 않기로 한 아이


중학교 3학년(16살), 백혈병 진단을 받았다. 치료를 받기 위해 병원에 입원하면서 나는 학교와 친구, 일상의 흐름에서 완전히 단절되었다. 그 시기는 고통스럽고도 이상하게 조용한 시간이었다. 매일 소아 병동이라는 좁은 세계 안에서 반복되는 시간 속에 갇혀 있었다. 처음에는 무섭고 서럽고 억울한 감정들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하지만 그 감정들을 밖으로 꺼내기란 너무 어려웠다.


부모님은 나를 위해 애쓰셨고, 병원에서는 침착하고 잘 견디는 환자가 좋은 환자였다. 투병 시기, 내가 필요한 말 외에 정신적으로 힘든 이야기들을 솔직하게 표현하면 부모님이 너무 힘들어하시는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그때부터였을까, 나는 내 감정과 생각들을 숨기기 시작했다. "아프지 않아?", "무서워?"라는 질문에도 "괜찮아요"라고 대답하는 게 습관이 되었다. 감정을 억누르고 참고 버티는 것이 이 시기를 잘 넘기는 방법이라고, 그게 어른스러운 것이라고 믿었다. 그렇게 나는 말하지 않는 아이가 되었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곧 강함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시간은 내 안의 감정을 봉인하는 훈련이 되어버렸다. 무언가 느끼는 게 불편하고, 표현하는 게 두려운 상태. 마음을 감추는 것이 자연스러워졌고, 결국 나는 내 감정에 스스로 둔감해졌다. 때때로 울고 싶은 감정이 올라왔지만, 울 수 없었다. 울면 내가 더 약해지는 것 같았고, 무너질 것 같았다. 그래서 아무렇지 않은 척, 괜찮은 척, 늘 괜찮다고 말하며 나를 속이는 데 익숙해졌다.


병원에서는 침묵이 일상이었고, 감정을 나눌 또래 친구도 없었다. 소아 병동에는 나보다 훨씬 어린 아이들뿐이었고, 나는 그 속에서 외톨이였다. 회진이 끝난 오후, 혼자 병실에 남아 창밖을 보며 멍하니 시간을 보내는 날들이 반복됐다. 나는 감정을 억누르는 데 너무 익숙해졌고, 결국 스스로의 감정이 무엇인지도 잘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갔다. 나중에 정신과 치료를 받으며 깨달은 건, 그때부터 이미 나는 내 감정과의 연결을 끊기 시작했었다는 것이다.


17살, 항암 치료가 끝나고 고등학교에 중도 입학했다. 학교를 1년 쉴 경우 한 살 어린 학생들과 지내야 한다는 부담감, 중간에 복학할 경우 머리카락이 거의 없는 모습으로 받아야 할 시선에 대한 두려움 사이에서 고민하다 결국 동갑 친구들과 지내는 것을 택했다. 하지만 학교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체력은 바닥이었고, 1년간의 학업 공백은 너무 컸다. 수업 내용을 따라갈 수 없었고, 어디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지 막막했다. 공부를 포기하면서 자존감은 더욱 떨어졌고, 내 모습이 혐오스러웠다. '나는 왜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하는가' 하는 생각에 우울감은 깊어졌다. 마음의 문을 굳게 닫고, 다가오는 친구들에게 차갑게 반응하며 반에서 겉돌았다.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걸어가는 길, 수십 번씩 차에 치여 죽어버릴까 하는 충동을 느꼈지만, 나를 사랑하는 부모님 생각에 차마 그럴 수 없었다. 자살 충동과 우울함에 억눌린 채 하루하루를 버텨냈다. 그때 솔직하게 감정을 털어놓고 도움을 요청했더라면 덜 고통스럽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가 지금도 남아 있다.


경계에서 홀로 서 있던 아이


나는 늘 어딘가 경계에 서 있는 아이였다. 온전히 '문제아'로 낙인찍힐 만큼 큰 사고를 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평범한 아이'의 범주에 속하지도 못했다. 늘 뭔가 부족하고, 어설프고, 다른 아이들과는 미묘하게 다른 결을 가지고 있었다. 투병 경험은 나를 더욱 애매한 경계로 밀어 넣었다. '아픈 아이'로 분류되기에는 겉으로 너무 멀쩡해 보였고, 그렇다고 완전히 '건강한 아이'로 돌아가지도 못했다. 나의 어려움들은 종종 병 때문이라는 편리한 설명 뒤로 숨겨졌고, 나 역시 그 설명을 방패 삼아 진짜 문제를 외면하곤 했다.


수업 중 자주 딴짓을 하고, 물건을 잘 잃어버리고, 감정 기복이 심했지만, 나는 선생님의 골칫거리 '문제아' 명단에는 오르지 않았다. 병원에서는 힘든 치료를 묵묵히 견뎌내는 '착한 환자'였고, 학교에서는 눈에 띄지 않는 적당히 조용한 학생이었다. 그래서 어디에서도 나는 온전히 주목받지 못했다. 칭찬도, 비난도 없이. 그저 누구의 시선도 오래 머물지 않는, 희미하고 애매한 존재로 그 경계 위에 위태롭게 서 있었다.


이름 붙일 수 없는 그 경계의 공간은, 그러나 생각보다 훨씬 더 외롭고 황량했다. 어떤 도움도 명확하게 요청하거나 받지 못했고, 누구에게도 온전히 이해받지 못한다는 느낌 속에서 혼자 감당해야 할 감정들은 차곡차곡 쌓여만 갔다. 친구들과도, 심지어 나를 가장 사랑하는 가족과도 나는 일정한 거리를 두었다. 내 안의 혼란과 어려움을 설명할 언어를 찾지 못했기에, 그저 감정을 숨기고 '괜찮은 척'하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나 스스로조차 내가 왜 힘든지, 내가 누구인지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갔다.


그 희미하고 불안했던 경계의 시간이야말로 내가 나 자신을 가장 깊이 놓치고 있었던 시간이었다. 내가 왜 힘든지 설명할 언어가 없었기에, 그 모든 어려움을 그저 '내 탓'이라고, 혹은 어쩔 수 없는 '투병 때문'이라고 체념하며 외면해버렸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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