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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진필 Mar 29. 2024

원룸에 살고 싶다

 서울에 온 지 6개월 만에, 아직 신입생 딱지도 채 떼지 못했던 나는 혼자 살 방을 얻어야 했다. 서울에 와서 반년을 살았지만 학교가 있는 이대역에서 얹혀 살던 방이 있는 신림역까지만 도돌이표가 있는 악보 위의 음표처럼 왔다 갔다 했던 내가 벼룩시장, 교차로 같은 정보지를 뒤졌다. 학교까지 통학에 무리가 없으면서도 무엇보다 부모님이 주시기로 한 돈의 범위 안에서 반드시 '전세방'을 얻어야 했다.

              

 이대 역이나 신촌, 홍대 쪽으로는 가진 돈에 비해 집값이 터무니없이 비쌌다. 월세 수십 만 원을 끼면 안전하고 쾌적하게 살 만한 집을 찾을 수 있었으나 군무원인 아빠 월급에 한 번 호미질하면 캐어지는 올망졸망한 감자들 같은  여덟 식구의 입이 매달려 있던 터라 월세는 언감생심이었다. 그러나 학교 주변에서는 부모님께서 주신 돈으로 반지하가 아니라 지구 중심까지 지하로 내려간다 해도 원룸은 고사하고 방 하나도 얻을 수 없었다.   

         

 방향을 틀어 모래내 시장, 북가좌동 쪽을 찾아보니 비로소 가능성이 있는 방들이 보였다. 적어도 벼룩시장, 교차로 같은 정보지 광고로 보았을 때는 그랬다. '방 1개, 화장실, 부엌', 이 세 가지가 쓰여 있는 한 줄 광고를 손가락으로 짚어 가며, 여러 번 읽어야 이해되는 어려운 책을 읽듯 반복해서 훑었다. 여러 군데 전화를 해 봤지만 직접 보러 갈 만큼 예선을 통과한 방은 고작 서너 개였다.  

             

 그중에 내가 최종 선택한 방은 이대 앞에서 버스를 타고 모래내 시장을 지나 두 정거장을 더 간 후 내려서 십 분 정도 걸으면 있는 방이었다. 처음 그 방을 보러 갔던 날은 평생 잊히지 않을 것 같다. 만으로는 스무 살도 안 된 내가, 서울에 온 지 반년밖에 안 된 내가, 강릉 사투리도 채 떨구지 못한 내가, 부모님이나 친구와 동행하지 않은 채 살 방을 구하려고 낯선 동네에 혼자 발을 내밀었다. 이미 두 개의 방을 본 후 글자로 표현된 집과 실제의 집은 다르다는 것을 깨달은 나로서는 무거운 마음으로 간 집이었다.      

         

 허술해 보이는 파란 대문을 여니 짙은 회색 시멘트 위에 어떤 색깔의 페인트 칠도 하지 않은 야트막한 단층집이 있었고 몇 걸음 떨어져 비로소 주인집다운 멀쑥한 본채가 자리 잡고 있었다. 들어가자마자 있는 그 무성의한 작은 단층집이 바로 정보지에 나온, 부모님이 주시기로 한 돈에 딱 맞는 전세방이었다. 어찌 보면 하인들이 머물렀던 행랑채 같기도 했고 아무튼 자투리 공간에 얼마 간의 세를 받기 위해 얼렁뚱땅 지은 것이 분명한 방이었다. 나를 맞은 부부는 본채에서 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혹은 부모님께 얹혀 사는 분들이었는데 하필이면 내가 방문한 시간에 손님들이 잔뜩 와 있었다. 싼 집을 보러 다니다 보면 이미 가난함을 내보인 탓에 집주인 앞에서 주눅이 들게 마련인데 어수선하고 분주한 분위기까지 더해지니 어깨가 자꾸 옹송그려졌다.  

             

 철제문을 열고 들어 서니 타일이 붙어 있는 바닥의 왼쪽에 조그마한 싱크대가 있었다. 그리고 맞은편에 샤워기가 설치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부엌과 샤워실이 네모난 공간에 같이 있는 셈이었고 흙 묻은 신발을 그대로 신고 들어오게 되어 있었다. 몹시 좁은 그 공간을 지나 방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었는데 방문은 창호지가 발린 옆으로 밀어서 여는 것이었다. 그런데 화장실은 어디 있는 거지? 바로 행랑채와 주인집 중간에 조그맣게, 결국 집 밖에 화장실이 있는 것이었고 좌변기가 아닌 쭈그려 앉는 변기였는데 낮은 천장에 알전구가 붙어 있었고 용변을 보고 수도 앞에 놓여 있는 양동이의 물을 바가지로 퍼부어야 하는 시스템이었다. 수동 수세식이랄까, 반 수세식이랄까. 어둡고 지저분하고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집은 허름해도 상관없었으나 화장실이 문제였다. 하지만 주어진 돈으로 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되는 화장실까지 딸린 집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던 나는 계약을 했다. 계약서를 쓰고 나서 부모님의 전재산일 듯한 그 소중한 돈을 사기당한 것이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이 얼마나 엄습하던지 이삿짐을 내리고 열쇠를 받기 전까지 좌불안석, 전전긍긍, 노심초사하며 쓸데없이 이것저것을 묻는 전화를 주인집에 하곤 했다.    

           

 이사를 하고 나서 가장 큰 변화는 귀가 시간이 늦어졌다는 것이다. 내가 주로 수업을 듣던 인문대학 건물은 후문 바로 옆에 있었다. 후문을 지나 육교만 건너면 연세대 동문과 연결되었으니 큰길가에 있는 것과 다름없는 건물이었다. 건물 지하에는 과방들이 도열해 있었는데 그곳에는 상당히 늦은 시간까지 머무를 수 있었다. 국문과 과방은 자유분방했고 대부분 누군가가 있었다. 담배 연기가 자욱할 때도 있었고 지저분한 것들을 아무도 치우지 않는 분위기였다. 소문에 의하면 옆의 영문과, 불문과 과방은 같은 인문대학이라도 사뭇 다르다고 했다. 그런 과 학생들은 지하의 축축한 과방에 아예 잘 오지 않는다는 말도 들렸다. 어쨌든 나는 저녁 식사까지 학교 식당에서 해결하고 과방에서 최대한, 나가야 할 때까지 머물렀다. 그리고 꼭 화장실에 들른 다음에 집에 왔다. 그래도 집에 머무는 동안 한 두 번은 화장실에 가야 했지만.         

      

 어느 날 밤, 자려고 누웠는데 부엌 쪽에서 달그락달그락 미세한 소리가 들렸다. 처음에는 잘못 들었나 했는데 또 잠시 후에 같은 소리가 반복됐다. 무서웠지만 소리의 정체를 밝히지 않고는 도저히 잠들 수가 없었고 싱크대와 샤워기가 마주 보고 공존하는 부엌의 불은 켜 둔 채였기 때문에 용기를 내어 방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세상에, 쥐였다! 샤워기 아래에 당연히 바닥에 물이 빠지는 작은 수챗구멍이 있고 그 구멍은 촘촘한 격자무늬로 구멍이 난 마개로 덮여 있었는데 그 마개를 모자처럼 머리에 얹은 쥐가 두리번두리번하고 있었다.   

            

 숨이 헉 멎었다. 시골에 살면서 쥐를 종종 보았으나 집 안의 쥐를 본 것은 처음이었다. 눈이 마주친 것 같았는데 쥐는 도망가지 않았다. 서울은 쥐도 영악하구나! 잠시 후 쥐는 구멍 속으로 쏙 들어갔다. 안도의 숨을 쉬자마자 쥐는 다시 아까보다 더 많이 고개를 쑥 내밀었다. 몇 번 저러다가 쥐가 통째로 부엌 바닥으로 올라설 것만 같았다. 방 안을 둘러본 후 던진 다음에 버려도 되는 물건을 정하고 구멍을 향해 던졌다. 화들짝 놀란 쥐가 수챗구멍 속으로 쏙 들어갔다. 한참 지나도 움직임이 없었다. 용기를 내어 책으로 벽을 탁탁 두드리는 소리를 내며 수챗구멍까지 걸어갔는데 그 몇 걸음이 서울에서 강릉까지 걸어가는 것보다 멀었다. 세숫대야에 비누함을 담고 수챗구멍 위에 놓았다. 설마, 저 정도의 무게를 들 만큼 천하장사인 쥐는 없겠지 하면서. 그 후로 샤워기에서 물이 뿜어져 나올 때를 제외하면 그 구멍은 한 번도 빛을 보지 못했다. 싱크대를 열어 틈새가 있는 모든 구멍을 천 쪼가리들을 뭉쳐서 막았고 음식은 한 번도 해 먹지 않았다.       


 임철우의 '붉은 방'처럼 멋진 소설을 읽고 독서토론을 하던 과 동기들이 이사한 집 구경을 오고 싶다고 하도 졸라서 마지못해 초대했을 때, 열심히 토스트기에 식빵을 구워 딸기잼을 발라 주면서도 누군가가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뿐이었다. 친구들은 혼자 살기에 딱 맞는 집이라는 엉성한 찬양의 말들을 해 주었지만 오래 머물지는 않았다.      

          

 한 번은 샤워를 하는데 바로 위의 조그마한 창문에서 낄낄거리는 숨 죽인 웃음소리가 들렸다. 놀라서 샤워기를 끄니 사다리를 치우는 것인지 소리가 들리고 후다닥 멀어지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다음 날 그 창문에 신문지를 발랐다. 수챗구멍, 창문 등 집 안의 구멍이라는 구멍은 이제 모조리 막힌 셈이었다.       

         

 그 집에서 1년을 살았다. 그다음은 옥탑방으로 이사를 갔고 그 후로도 1년에 한 번씩 이사를 다녔다. 서울에 머문 햇수만큼의 방을 거쳤다. 어차피 같은 돈으로 얻을 수 있는 방들의 수준이 거기서 거긴 것을 알면서도 헛된 희망을 자꾸 품었다. 그중 집 안에서 쥐를 본 방은 두 개였다. 내가 서울에 사는 7년 동안 강릉 엄마는 졸업식 전날 서울에 올라 와 딱 하룻밤을 주무셨고 아빠는 한 번도 서울에 오시지 않았다.       

        

 나는 죽을 때까지 원룸에서 살고 싶다. 오피스텔도 아니고 원룸이어야 한다. 투룸도 싫고 쓰리룸도 싫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는데 나는 원룸에 한이 맺혔다. 서울에서 살았던 이십 대 시절 내내 '원룸'에서 사는 꿈을 꾸었다. 특히 자려고 누웠을 때는 매일마다 수도 없이 다양한 형태의 원룸을 짓고 소박한 침대와 책상, 옷장 하나가 놓인 그 공간 안에서 걸어 다니는 나를 상상했다. 그 시절, 그렇게 말간 단 하나의 방만 있었더라면 나의 이십 대는 좀 더 행복했을까.               


 나만 안 본다는 유튜브에서 '자취방 소개 영상'을 최근에 본 적이 있다. 그런데 서울에는 아직 내가 살았던 방 같은, 심지어 그보다도 못한 방들이 아주 많았다. 그런 방에서 고단한 몸을 뉘고 있는 청춘들은 내가 그러했듯 매일 밤 원룸 꿈을 꿀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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