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이 익는 시간
세월이 흐를수록 더 나은 것이 최고의 와인이다
라는 라틴 격언이 있다.
그래서 아이가 생기고 나서
하고 싶은 일 중 하나가
아이가 태어난 해에 만든 와인이나
좋은 양주 한 병을 사서,
아이가 성인이 되는 날 함께 마시는 것이다.
아이의 새로운 출발을 축하하고
우리 부부에게는
격려와 위로가 담긴 술 한잔을 하고 싶다.
비록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에게
술부터 먹일 생각하는
못난 아빠이지만,
그날을 기다리는 마음은 어쩔 수 없다.
우리 아버지도
비싼 술을 모으는 취미가 있으셨다.
다만, 그 '비싼 술'의 정의가 나와 달랐다.
아버지는 와인과 양주를 비싼 술로 생각하셔서 가끔 있어 보이는 케이스에 들어오는
와인과 양주는 제대로 보지도 않으시고
베란다 가장 깊숙한 본인의 만의
보물창고에 조용히 숨기셨다.
최근에 아버지의 보물창고가 열린 건
작년 겨울이었다.
신혼여행을 마치고
양가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러 갔었다.
그때까지 나는 아내와 함께
본가를 찾은 적이 없었다.
아내는 결혼 전부터 우리 집에
초대를 기대하였지만,
나는 매번
“집이 좀 정리가 안 돼서...”라며
식당에서 식사하고
다음에 가자고 달랬다.
사실은 부끄러웠다.
어두운 골목길, 낡은 집, 얼룩진 벽지.
그런 모습을 보고 아내가 실망할까 봐.
그땐 뭐라고 말해야 할지도 몰라서,
집에 데려오는 것을 피하게 됐다.
부모님한테는
“음식 준비하시는 거 번거로우시잖아요”
하며 식당에서 보자고 했다.
부모님은 별말 없이 내 말에 따라주셨다.
그런데 이제는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집에 가까워질수록
아내는 첫 방문에 긴장을 하고
나는 아내의 얼굴을 살피느라 땀이 났다.
눈이 소복이 쌓인 날
아버지는 도착시간 30분 전부터
집 근처 골목길에 나와계셨다.
혹시나 비좁은 골목길에
차가 못 들어올까 추운데도
미리 나와 서 계셨던 거다.
집에 들어서는 순간,
곰팡이 피었던 벽지와 부서졌던 문고리는
새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집은 단정히, 따듯하게 우리를 맞이했다.
후일 누나는 나에게
부모님이 우리 부부가 올 거라고,
벽지도 새로 하시고
집안 구석구석 닦고, 쓸고 고치시며
기다렸다고 말해주었다.
저녁 식사가 끝난 후,
아버지가 조용히 몸을 일으키셨다.
한참을 부스럭거리시더니
아버지의 깊은 술창고에서
검은색 박스를 가져오셨다.
세월의 먼지가 소복이 앉은
검은색 박스에는 와인 2병이 있었다.
화이트 와인 1병, 레드와인 1병
몇 년 전 단골가게 사장님에게
받았던 선물이라며 수줍게 말씀하셨다.
와인을 검색해 보니,
두병에 5만 원쯤
지금은 단종된 와인이었다.
당황한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우리 가족은 키득키득 웃었다.
그날 밤,
신혼여행 가서 먹었던 음식들,
아름다웠던 장면들,
결혼식 뒷이야기까지
우리는 저녁 깊은 시간까지
아버지의 와인과 함께 웃고 떠들었다.
그리고 아버지와 나는
붉은 홍시가 되어,
서로의 와이프에게
방으로 끌려가며
그날의 아쉬운 술자리를 마무리했다.
그날 밤
아버지는 최고의 와인을 드셨으리라
생각된다.
세월이 흐르면 익어가는 와인처럼
나의 기다림도 천천히 익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