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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맛

유년시절 할머니에 대한 기억

by 콩알아빠

“오늘은 확장공사를 하나, 배가 많이 당기네.”
“콩알아 엄마 아프니까, 오늘은 살살하자.”

와이프가 배가 당긴다고 말하면
나는 배에 손을 얹은 다음
시계 방향으로, 천천히 문지른다.

그럴 때면 신기하게도
와이프는 덜 아프다고 한다.

별다른 기술도 없는 손길이
어떻게 통증을 덜어낼 수 있을까.

나는 ‘손맛’이란 걸 믿는다.
요리할 때의 손맛,
아픈 사람을 어루만질 때의 손맛,
그리고
누군가를 위해 쓴 편지에 스민 손맛,


그 모든 ‘맛’에는 마음이 들어 있다.


그 마음에 진심이 전해질 때
비로소 손맛은 완성이 된다.

지금은 안 계시지만
내게 ‘할머니의 손맛’이 또렷하게
남아 있는 밤이 있다.

유년 시절, 우리 동네에 큰 불이 났었다.
옆집은 불에 탔고,
겨울의 냉기가 집 벽을 뚫고 들어왔다.

부모님과 떨어져 지낼 수밖에 없어
할머니 댁에 맡겨졌다.

할머니는 말수가 적은 분이었다.
소파에 앉아 조용히 티브이를 보시며
무엇을 하라거나 하지 말라는 말씀도 없었다.

나는 어색했다.
태어나 처음으로 오래 함께하는 시간이었으니.

혼자 방에서 놀다가
어느새 잠이 들었고
몸이 아 잠에서 깼다.

하지만, 아프다고 투정을 부릴 상황도
투정을 받아줄 사람도 없기에
혼자 끙끙 앓으며
다시 잠이 들었다.

눈을 떴을 때는
부모님이 곁에 와 있었고

몸은 더 이상 아프지 않았다.

한참 후, 부모님은 그날 이야기를
내게 해주셨다.

내가 열에 시달리며 앓고 있었던 밤,
할머니가 물수건으로

잠이 든 내 이마와 몸을
열이 내릴 때까지 닦아주셨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렇구나, 하고 말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할머니의 손길이 내 안에서 자라났다.
할머니의 손길은 말보다 깊었고,
내 몸 어딘가에 닿아 있었다.

이제는 내가 손을 얹는다.
아내의 배에, 콩알이의 작은 집 위에.
할머니가 나에게 그랬듯,

배가 덜 아프기를,
잠이 조금 더 오기를,
편안해 지기를

그런 마음을 담아
조심스럽게 손을 얹는다.

그리고 생각한다.
그날 밤, 말없이
아픈 손주를 위해 물수건을 얹어주신
할머니의 손길이

지금 나를 거쳐
아내에게,
그리고 아이에게
닿을 수 있기를.

그건 어쩌면,
손을 타고 흐르는 가장 오래된 맛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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