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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Z아빠들

그림자아빠

by 콩알아빠


"콩알대리님, 이 회사는 아이를 가지면 안 돼요."

3년 전, 이직 후 모든 것을 다시 배워야 했다.
하지만 경력직에게 '적응 기간' 같은 건 없다.
매일 밤 10시, 11시, 늦을 땐 새벽 1시까지 일했다.

그래도 큰 불만은 없었다.
혼자 야근하고 바쁘면 억울한데,
우리 건물은 밤 10시에도
산업단지의 등대가 되어 환했다.

그러던 어느 날, 옆팀의 에이스로

불리던 대리가 퇴사했다.

고과 상위권, 상사의 신뢰, 보장된 앞날.
그런 그가 회사를 떠난다는 건 의외였다.
회사 고위임원까지 나섰으나 그의 퇴사의지는 확고했다.

그러다 그와 대화할 기회가 생겼다.

"잘 다니시던데 왜 그만두세요?"

"그냥… 지쳤어요."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아이를 돌볼 시간이 없어요.
아내가 육아 때문에 많이 힘들어해요.
부부싸움도 점점 잦아지는 것 같..

..
콩알대리님, 이 회사는 아이를 가지면 안 돼요."

긴 침묵이 흘렀다.
지금 대화를 나누는 이 시간도 주말이었다.
그렇게 그와의 짧은 대화는 끝이 났다.

그가 나가기 전 망할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던 사내분위기는
막상 그 퇴사하자 변함이 없었다.
여전히 바빴고, 그의 자리는 금방 메꿔졌다.

그렇게 적응기간 끝나고
한 사람의 몫을 해낼 때쯤이었다.

고객에게 송부할 자료회의를 마친 밤 11시,
팀장과 나는 머리를 식힐 겸
회사 벤치에 앉았다.
그는 나에게 딸이 그린 그림을 보여줬다.

"콩알대리, 이것 봐봐

이게 자기고, 옆에가 엄마래. 잘 그렸지?
그런데 웃긴 게 이 그림에 나는 없어..

맨날 회사에 있어서… 안 그렸대."

그는 한참을 가족그림 속
자신의 자리를 찾고 있었다.

가로등 불빛이 그의 등을 비추었고
짙고 쓸쓸한 그림자가
딸아이의 가족 그림 속

빠 자리를 대신하 있었다.


그리고
그는 다음 해에 회사를 그만두었다.

콩알이를 가지기 전엔
떠난 사람들의 말이 실감 나지 않았다.
그리고 공감보다는 연민에 가까웠다.

하지만 지금은,
그 빈자리가 낯설지 않다.

퇴사를 고민해 봤다.
워라밸이 보장된 회사, 정시 퇴근, 가족과 저녁을 먹는 삶.

하지만 그런 곳은
출퇴근 거리가 멀거나, 주말부부를 해야 했다.

그리고 월급이 적었다.

결국 아내와 나 둘 중 한 명의
더 많은 희생이 필요했다.

나는‘일, 양육, 월급’이라는
빠져나올 수 없는 뫼비우스의 띠 안에 서 있었다.

며칠 전, 나에게 그림을 보여준
팀장에게 전화가 왔다.

가족들과 나들이 가는 중에
우리 동네를 지나가면서
생각나 연락을 했다고 한다.

그의 목소리는 회사에 있을 때와 달랐다.
밝고, 여유 있고, 가벼웠다.

회사와 서로의 개인적인 근황을 물었고

그의 딸아이의 축하를 받으면서
전화를 끊었다.

"막내 삼촌, 아기 축하해요"

어두운 회사 벤치에 앉아
한참을 그림 속 자신의 자리를
찾던 그의 모습이 생각이 났다.

이젠,
그의 딸이 그린 가족 그림 속에도
아빠가 그려져 있으리라,

나도
그림자 아빠가 아닌
그림 속 한 자리를
차지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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