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은 하늘이 내리는 하얀 위로

태안 만리포 바다라는 이름의 온도

by 지영그래픽
맑은 하늘이 내리는 하얀 위로

태안 만리포 바다라는
이름의 온도



​겨울 바다는 흔히 적막이나 단절을 떠올리게 하지만, 오늘 내가 마주한 태안 만리포의 바다는 조금 다른 이야기를 건네고 있었다.

​창밖의 풍경은 이질적이다.

하늘은 분명 맑은 얼굴을 하고 있는데,

그 투명한 대기 사이로 하얀 눈발이 소리 없이 흩날린다.

태안 만리포

예고 없이 찾아온 손님처럼, 혹은 하늘이 몰래 터뜨린 꽃가루처럼,

맑은 하늘 아래 쏟아지는 눈송이들은 햇살을 투과하며 보석처럼 반짝였다.

​사람들은 이를 두고 기상 이변이라거나 변덕스러운 날씨라 말할지 모른다.

하지만 따뜻한 카페 안에서 이 광경을 목격하는 나에게는, 그것이 하늘이 부리는,

'다정한 장난'처럼 느껴졌다.

​통창 너머로 보이는 파도는 매섭게 해안가를 때리며 제 존재를 과시한다.

하지만 그 너머 수평선은 눈송이와 섞여 묘하게 부드러운 경계선을 만들어낸다.


차가운 바닷바람과 대조적으로, 카페 안의 공기는 커피 향을 머금어 한없이 안온하다.
​테이블 위에는 시원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과 정갈하게 놓인 치즈 케이크 한 조각.

차가운 음료를 마시며 따뜻한 풍경을 바라보고, 차가운 눈이 내리는 바다를 보며 따뜻한 온기를 갈구하는 이 모순적인 순간이 참으로 달콤하다.

​우리의 삶도 이와 같지 않을까.
맑은 날이라고 해서 늘 햇살만 비치는 것은 아니며, 눈이 내린다고 해서 반드시 어둡고 추운 것만도 아니다. 슬픔의 한복판에서 뜻밖의 위로를 발견하기도 하고, 가장 찬란한 순간에 묘한 상실감을 느끼기도 하는 것이 인생의 문법이다.


맑은 하늘에 내리는 저 눈송이들은, 어쩌면 우리가 규정해 놓은 삶의 공식들이 얼마나 무의미한지를 말해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창가에 나란히 놓인 빈 의자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바다를 읽어내고 있다.

나 역시 그들 사이에 섞여 잠시 걸음을 멈춘다. 서둘러 목적지로 향했다면 보지 못했을 풍경. '잠시 머무름'이 허락한 이 우연한 사치는, 일상에 지쳐있던 마음에 얇은 온기를 덧댄다.

​데크 위로 내려앉아 이내 투명하게 사라지는 눈송이들을 보며 생각한다.


사라지는 것은 결코 허무한 것이 아니라고. 맑은 하늘 아래서 잠시 나를 설레게 했던 저 눈발처럼, 우리 곁을 스쳐 지나가는 짧은 순간들이 결국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따뜻한 동력이 된다는 것을.
​커피 한 모금에 바다 한 점, 그리고 눈송이 하나를 마음속에 갈무리한다.

오늘 만리포의 바다는 나에게 차가움이 아닌, 세상에서 가장 따스한 '하얀 위로'를 선물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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