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만 일어나는 event
1년을 버텨 2년 차에 접어들었다.
이때까지만 버티자며 달력에 스스로만 아는 퇴삿날을 정해두고 조금씩 기간을 늘려오다 보니 1년을 버텨낼 수 있었다. 1년만 버티면 좀 편해질 줄 알았다. 과연 그랬을까?
1년을 버티고 나니 준중환자실 환자들을 보게 되었고, 메인 트레이닝까지 받는 책임감이 주어졌다. 지나고 보니 짧은 기간 안에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시간이었지만 당시의 나는 고작 1년 차 밖에 안 되는 연차에 막중한 책임감을 부여받고 불평, 불만인 날들이 많았다.
힘들면 더 힘들었지 편한 날은 손에 꼽았다. 시련과 위기가 많았던 2년 차였다. 준중환자실을 보던 어느 날 출근해 환자 파악을 하고 있는데 환자 파악이 대강 끝나고 라운딩을 가려고 하던 중 arrange를 담당하는 메인 선생님께서 선임 선생님에게 배정되었던 환자 한 명을 나보고 보라고 했다. 투석을 가서 상태가 안 좋아져 투석 후 준중환자실에서 환자를 봐야 한다는 것이다. 영문도 모른 채 다짜고짜 나에게 보라고 하시니 이브닝 근무 시작 전 다급하게 환자 파악을 하려고 했지만 제대로 눈에 들어오지는 않았다. 몸으로 부딪힐 수밖에 없다는 생각으로 일단은 일을 시작했다.
그리고 투석을 갔다가 혈압이 떨어지고 Hb이 떨어진 환자가 수혈을 달고 준중환자실로 입실했다. 환자의 상태가 정말 안 좋아 보였다.
데이, 이브닝, 나이트. 간호사의 3교대 근무 중 나는 이브닝 근무를 제일 싫어한다. 데이 때 일이 해결이 안 되면 티브닝으로 미룰 수 있지만 이브닝은 마지노선으로 일을 해결해야만 하고, 늦은 퇴원을 보낼 때도 있고, 수술이 끝난 환자도 받아야 하고, 신환 입원도 받아야 한다. 이 업무들은 순차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날 때가 많다. 그래서 이브닝 근무를 할 때는 저녁 식사도 거른 채 수술 온 환자도 받아야 하고 입원도 받느라 정신없다. 이때 담당 환자의 event라도 터지면 일은 끊임없이 추가된다.
그날이 그런 날이었다.
투석 환자의 혈압을 쟀는데 190대의 높은 혈압이 나왔다. 얼굴과 손 쪽으로 경련하는 모습을 보이더니 혈압은 80대로 갑자기 낮아졌다. ‘이게 맞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노티를 하고 hydration을 하고 환자를 보러 온다는 데 혼자서 정신없이 바쁜 와중에 이비인후과 환자 상태가 안 좋은지 처치실로 빼고 난리도 아니었다. 내 환자 상태도 안 좋았기 때문에 도와줄 여력도 없이 내 일을 쳐내기에 바빴다.
인턴 주치의가 왔으나 환자를 보고도 뭘 해야 할지 모르는 눈치였다. 신경과 당직의를 불렀다. seizure 하는 환자의 모습을 보더니 ativan을 주라고 했다. 처음 줘보는 ativan을 IM으로 통해 줬는데 신경과 의사가 경련하는 환자에게는 IV로 줘야 한다고 알려줬다.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상황이 처음이었고 처음이기에 당황스럽고 서툴렀다. 그리고 끝나지 않은 event들에 정신이 혼미해지고 그 환자의 담당으로 책임을 지고 해결해 내야 했기에 버거웠다.
ativan을 주고 난 뒤에도 상황은 정리되지 않았다. 이때의 기억이 생각도 나지 않을 만큼 정신없이 바빴고 쉼 없이 일하고 나서 이브가 끝날 즈음에는 환자를 icu로 보내라는 오더가 떨어졌다.
계속해서 추가 오더는 나고 처음으로 보내보는 icu 준비도 해야 하고 세상이 나에게 왜 이런 시련을 주는가 싶었다. 나의 상황에 감정이 이입되면서 벅차오르는 감정을 애써 전동기록지를 쓰며 억누르고 있는데 선임선생님이 나를 도와주려 “이 환자 엑스레이 보내면 돼?”라고 하는 말에 긴장의 끈이 풀리면서 눈물이 왈칵 쏟아지고 말았다.
전동기록지에는 일기를 적듯이 나의 상황에 벌어진 모든 event들을 써 내려갔다. 눈물은 수도꼭지를 틀어놓은 듯 뺨을 타고 마스크 안으로 뚝뚝 떨어졌다. 옆에 있던 나의 프셉은 나를 위로해 주었다.
나를 힘들게 했던 그 환자를 icu에 보내고 나서야 상황은 종료되었고 마침내 퇴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깜깜한 밤이 되어 맞이하는 퇴근길에 아무도 없는 도로에서 소리 내어 엉엉 울면서 집으로 들어갔다. 집에 와서도 계속 울었다. 일이 힘들고 버겁게 느껴졌다. 퇴사가 하고 싶어졌다. 달력을 보면서 퇴삿날을 잡았다.
‘그래 이때까지만 참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