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습의 악습의 악습의 반복
우리의 몸은 나쁜 습관에는 쉽게 적응하지만 좋은 습관을 들이기 위해서는 노력을 필요로 한다.
처음 시작한 병동의 환경도 이와 비슷했다. 선후배 관계가 명확한 수직적인 분위기, 막내잡, 막내 자리를 두어 전화를 받게 하는 일, 올드들의 기호에 따라 바뀌는 환자배정 등등 이미 악습은 반복되고 있었다. 위에서 노력하지 않는 한, 이러한 악습은 사라질 일이 만무해 보였다.
선배들에게서 들은 ‘18의 난’이라는 게 있었다. 18년도에 입사한 신규 간호사들이 불공정한 막내잡과 병동의 시스템에 불만을 품고 우르르 단체 응급사직을 한 것이다. 이 당시 내가 겪었던 막내잡만 해도 추가되는 번거로운 일들은 다 막내들이 해내야 했고 가장 먼저 출근해서 모든 팀의 환자파악 종이를 뽑아 놓아야 했다. 업무능력이 미숙해 환자를 보는 데만 해도 힘들고 촉박한 시간 속에서 막내 잡은 또 다른 장애물이었다.
첫 독립을 하던 날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막내잡과 환자파악을 위해 지금보다 1시간 더 일찍 출근하던 시절, 열심히 다른 팀들의 환자파악 종이를 뽑았지만 그것조차도 미숙해서 환자파악하는 데 줄어드는 시간에 똥줄을 탔던.
병동의 부조리에 반항하는 ‘18의 난’ 덕분에 이전보다 막내 잡은 줄어들었다고 하지만 “라떼는 말이야” 시전을 하는 올드들 꼰대 마인드에는 변함이 없었다. 한 해에만 열댓 명 넘게 투입되어 신규간호사로 함께한 나의 동기들은 1년 넘게 ‘애기’라는 호칭으로 막내 잡을 떠맡고 그저 ‘신규’라는 이유로 그들의 적이 되어있었다.
이들의 악행은 끝나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자신들이 힘들다 싶으면 입맛대로 시스템을 확 바꿔버렸다. 병동 내 ‘준중환자실’이라는 게 있었다. 중환자실 가기 직전의 환자나 상태가 안 좋아 좀 더 intensive care를 필요로 하는 환자들을 돌보는 병실로 중증도가 있어 처음 입사했을 때만 해도 2~3년 차 정도 숙련되었을 때 볼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갑자기 이러한 룰이 바뀌었다. 1년만 되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올드 선생님들은 입사 달이 달랐던 동기들의 1년이 되는 날짜들을 벼르고 있다가 1년이 되는 순간 어김없이 준중환자실 병실을 보게 했다.
불합리한 일들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사다리 타기’ 환자 배정. 병동 간호사들은 보통 45~50 베드의 환자들 함께 일하는 간호사들끼리 1/N로 나눠서 본다. 보통은 동선이 짧게 이어지도록 병실 순으로 배정을 하고 예외로 힘든 환자들이 몰려 있는 경우 나눠서 볼 수 있도록 배정을 한다. 이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병실 배정은 일하는 1st grade의 올드 선생님의 job이다.
이곳에서는 중증도 고려보다는 연차 순 환자 배정으로 막내가 환자를 더 많이 보고, 사다리 타기식 배정으로 멀리 있는 환자를 끌어다가 보게까지 했다. 올드 선생님이 보는 병실에 힘든 환자가 있다? 그럼 나에게로 끌어와 내가 보게 하는 식이었다. 불합리한 시스템에 마음속에서는 화가 솟구쳤지만 일개 1년 차도 안된 신규 간호사인 나는 찍소리조차 할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동기들과 함께 으쌰으쌰 하며 동기들 간의 사이는 더욱더 돈독해졌다. 그리고 부조리와 불합리한 상황들을 버텨냈기에 우리에게는 끝없는 시련이 계속해서 반복되었다.
코로나가 만연했던 2년 전,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코로나와 씨름하던 때가 기억난다. 나를 포함해 대부분의 간호사들이 일하다가 코로나에 감염되어 근무 조정에도 많은 변화가 있을 때였다. 원내 코로나 환자가 많아지자 병동 내에도 아예 코로나 환자들만 보는 병실을 만들었다. 코로나 환자 남자병실. 그곳으로는 다른 병동에서 생겨난 남자 코로나 환자를 전실받고 격리기간이 끝나면 전실을 보냈다. 그곳에서는 여러 타과 환자들을 받는 것도 일이었으나 코로나가 대부분 면역력이 약한 환자들에게 침투하다 보니 대게는 상태가 안 좋은 환자들이 많았다.
올드 선생님들은 신규간호사들인 우리들만 코로나방을 볼 수 있도록 배정을 했고 코로나병실이 있는 병동 제일 끄트머리에서 홀로 고군분투할 수밖에 없었다. 코로나 병실을 보던 시기는 정말 최악이었다. 4중 보호구 착용을 한 채로 자주 순회도 들어가 보지 못하는 상황에서 타과로 가득 채워진 코로나 병실은 대환장 그 자체였다. 코로나 상황에서 섬망까지 온 코로나 환자들을 자주 볼 수 조차 없어 억제대 적용을 해야 했고 혹시나 싶어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가 보면 억제대를 어떻게 풀었는데 풀고 나와서 라인까지 disconnect 한 채로 피를 뚝뚝 흘리며 병실 앞에 서 있었던 환자는 정말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매일매일이 너무 힘들었고 일하다가도 도망가고 싶을 만큼 고되었다. 학생 간호사시절 말로만 들었던 차라리 출근하다 차에 치였으면...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스트레스가 극에 달해 몇 달간 생리를 안 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적된 스트레스와 피로를 등지고 출근을 해야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이트 때였다. 나이트 업무가 많아 실수를 하게 된 사건이 있었는데 너무 바빠 인계 시간까지도 일을 하고 있었을 때였다. 선임 선생님의 인계였는데 일을 잘 못한 것들이 한가득 걸러졌고, 나이트 중 실수한 건에 대해서 지적을 당하며 수 선생님한테 보고를 하고 가라고 했다. 사실 지금 생각해 보면 실수한 것도 나의 잘못이 맞고 반성하고 뉘우쳤으면 끝이었던 건데 그 당시에는 나에게 너무 가혹했던 것 같다.
수 선생님 방을 찾아가 실수한 이야기를 하고 나서 혼나기보다는 다음부터 주의하라는 말씀만 들었다. 내 실수를 스스로 용서할 수 없어서였을까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다. 그동안 억누르고 참고 버텨왔던 시련의 눈물들이 뒤엉켜 폭발하고 말았다. 홧김에 퇴사하고 싶다는 의견을 전달했다. 이대로는 도저히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몸도 마음도 완전히 망가져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수 선생님 등 뒤에서 눈물을 쏟아내었다. 하지만 돌아온 답변은 병원 인증기간을 코앞에 두고 퇴사면담은 지금은 어렵다는 것이었다. 시뻘게진 눈으로 집으로 돌아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한숨뿐이었다. 나는 가끔 생각한다. 이때 만약 굳은 의지로 퇴사를 했다면 내 인생은 지금쯤 어떻게 바뀌어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