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까미노
2012.8.12 (일)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는데 바로 걷기 시작하니 여전히 힘들었다. 한참 걷다가 고민 끝에 짝꿍이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예상은 했지만 진짜로 그럴 줄은 몰랐다. 물론 나 때문이 아닐 거라는 건 알고 있다. 운이 좋았던 것일 뿐이다. 프랑스 교환학생을 곧 시작하는 이 친구는 프랑스에서 살 기숙사가 구해졌기에 더 일찍 순례길을 마치지 않아도 되었고 그래서 항공권을 바꿀 수 있고 30일까지 여기에 나와 있을 수 있고 그리고 피니에스테라까지 갈 수 있다는 거. 그래. 이 아이의 계획일 거라는 거 이해한다. 그렇지만 조금은 당황스럽고 별 생각이 다 들기 시작했다. 온갖 복잡한 감정이 뒤섞이고 있었다.
나 때문이라는 말을 듣고 싶기도 했다. 솔직히 이유가 나였으면 하는 이기적인 마음과 동시에 왜 굳이 나 때문에 까미노의 일정을 바꿔야 하는 걸까 하는 미안한 마음이 공존했다. 나의 짧은 영어로는 전달되지 못했을 것 같다. 진심은 알았을까? 이 친구는 스페인 사람이라 나에게 참 많은 도움을 주었는 데에 반해 나는 아무것도 없다. 그냥 걷고 생존할 뿐이다. 아무것도 아닌 날 위해 희생해 주고 날 좋아해 주는 이 친구가 이해가 되지 않으면서도 너무 고마웠다. 그리고 청승맞게 울었다. 미안해하지 말라는 이 아이의 말로도 난 스스로 복잡한 감정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했다.
오늘도 순례길에서 만난 이탈리아 친구인 레레가 지나가는 말로 ' Boyfriend '라는 단어를 썼을 때 잠시 놀랐다. 우리가 정말 연인일까. 우리는 어떻게 돼 가는 걸까. 둘 다 우리의 관계에 대해서 한 번도 말을 꺼낸 적이 사실 없다. 이 아이가 너무 익숙해지는 게 두려운데 그럼 난 어떻게 되는 걸까.
오후 내내 소파에 앉아서 쉬고 있었는데 짝꿍이 전화를 받았다. 곧 까미노의 일정에 합류할 친구들이었다. 너무나 당연하게 이 친구가 전화로 소개해줬는데 많이 놀랐다. 당당하게 나를 소개해주는 모습에 정말 남자친구의 친구들을 보게 되는 느낌이랄까. 우리가 아무 사이도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괜스레 잘 보여야 될 것 같고. 둘이 있는 것도 좋지만 다 같이 있는 함께하는 재미도 결국 까미노의 매력이다. 한국요리를 친구들에게 해주기로 했는데 과연 어떤 요리를 내가 스페인에서 할 수 있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