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혼여행을 걸으러 간다고?

2023 올레

by Cielo

2023. 7. 20 (목)


제주도 올레길을 시작하는 첫 여정이 시작됐다.

아빠가 사준 든든한 설렁탕을 먹고 얼마 지나지 않아 청주공항에 도착했다.

천안에서 이리 가까울 줄은 몰랐다. 도착하자마자 아빠가 제주도에서 맛있는 거 사 먹고 현금이 필요할 수도 있다며 작은 봉투를 건네주셨다.


봉투엔 "Gute Reise nach Jeju vom Vater" (제주도에서 좋은 여행이 되길 아빠가)라고 적혀있고 우리의 신혼여행을 응원해 주는 아빠의 모습을 보고 잠시 코 끝이 찡해졌다.

외국인은 눈에 흙이 들어가도 안된다고 했던 아빠는 동거를 시작할 때 이삿짐을 나르는 걸 도와주더니

이제는 신혼 여행길까지도 차로 데려다주셨다. 엄마도 나한테 제주도에서 갈치 먹으라고 돈도 주시고 갑자기 우리의 가난한 여행이 풍족해지는 걸 느꼈다.


그래봤자 편의점김밥에서 컵라면추가 업그레이드일 수 있으나, 학생인 짝꿍과 퇴사자인 나에게는 달콤하고 소중한 지원금이다.


우리 엄마아빠는 내가 어릴 적 독일에서 살다가 한국에 와서 다시 피 터지게 일하고 적응하느라 이제야 나를 육아하는 느낌이 든다. 어릴 땐 부모님이 한없이 밉다고 생각이 들때도 있었는데 생각보다 내가 그 시간들을 견뎌 보상받는 느낌도 든다. 우리 부모님도 성장하지만 그 사이에 나도 많이 성장하는 듯하다. 지금 나이면 벌써 손주 보고 효도받으셔야 할 때인데 라는 생각도 들지만, 서른 살이 돼도 아직은 철없는 애기이자 딸이고 싶다.


청주공항을 일찍 와버린 탓에 약 3시간가량 공항 안에서 시간을 때워야 한다. 커피 한잔 시키고 이 작은 공항에 가만히 있어야 하긴 하는데 도착해서 우리의 여정이 가늠이 안되고 기분이 이상하다 그냥.


내일은 진짜 실전으로 걸어야 하는데 비가 온다고 한다.


아무렴 내가 스페인에서 900킬로도 걷고 부산-서울 횡단도 했다고 하지만 독일에서 열심히 찌워온 살과 한국에서 보상심리로 먹은 온갖 음식들을 배에 축척하고 걸을 수 있을까.


앞으로 내 미래가 너무 불투명하지만 이걸로 뭘 알아내진 못하겠지. 근데 적어도 내 자신감과 자존감 정도는 가져갈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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