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까미노
2012.7.28 (토)
아침엔 나바라대학교에 들려 대학인 순례자 여권과 도장을 받았다. 이전부터 순례길에 대해서 조사하던 중, 일반 순례자 여권과 달리 일정 대학교를 방문하며 스탬프를 찍으면 학위를 주는 시스템도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도장 깨기는 나의 오래된 취미기에 절대 이걸 놓칠 수 없지. 흐리디 흐린 날씨를 필두로 오늘은 산을 넘는 일정이었다. 아침으로는 코코아 한잔을 먹고 도시인 빰쁠로나를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산을 넘는 건 이제 어렵지 않았다. 뭐든 시작점의 피레네 산맥이 제일 어려워서 그랬나 보다. 산꼭대기에서는 사전조사할 때 봤었던 순례자의 상징물도 직접 보고 일찍 오늘 목표치를 완주해서 알베르게 바에서 점심을 먹는다. 사람은 배가 든든해야 한다 역시. 이젠 스페인어로 주문도 해보고 스페인에서 보까디요도 종류별로 먹어봐야겠다.
알베르게에 도착해서는 우리 일행 모두가 지쳐서 쉬고 있었다. 혼자 걸으러 오긴 했지만 막상 일행이 생기니 무엇이든 함께 하고 싶은데 내 마음과 다른 것 같아 기분이 이상했다. 순례길을 걷는 우리 모두 다 다른 체력의 사람들이라 사람이 모이면 힘든 점은 항상 생기고 나 스스로 이감정에 파고드는 듯했다. 일행이니 같이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 들다가도 남이 나에게 의지하는 건 싫은 건지. 앞으로 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다들 각자의 길을 걸으러 온 사람들인데 나는 함께 걷는 이 생활이 앞으로도 맞는 건지 고민스러웠다.
혼자 있고 싶다가도 외롭긴 싫은 이 간사한 마음.
시끌시끌한 마음과 조금은 축 처진 기분으로 시내를 향했다. 근데 점점 시내를 향해 갈수록 무엇인가 조짐이 이상했다. 사람들은 점점 많아지는듯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흰옷에 빨간 수건을 두르고 다녔다.
바로.. 축제였다!
광장 쪽에 가보니 사람들이 관객처럼 동그랗게 둘러져있었고 가운데에는 투우 경기장처럼 황소와 심판이 있었다. 처음엔 이게 말로만 듣던 스페인의 투우 인것인가 눈을 커다랗게 뜨고 쳐다봤지만 경기내용이 조금은 달라 보였다. 흰색 소의 뿔을 만지면 점수가 매겨지는 방식이었고 건장한 청년들이 나와 뿔을 터치하는데 괜히 내가 다 긴장됐다. 내가 보기엔 너무 위험해 보였는데 다들 강심장인지 축제를 즐기는 사람들도 점점 많아졌고 한 마리였던 소도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다..!!!
분명 난 단순하게 시내 구경만 하러 나왔는데 얼떨결에 축제를 보고 있고 소들도 있고.. 도무지 축제는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아 조금 더 구경해 보기로 하여 길가로 빠져나왔다. 길가에서는 시내를 돌아다니고 있던 B군도 만나서 같이 돌아다녔는데 골목은 사람들로 북적이고 옷이나 액세서리를 파는 가판대도 보였다. 너무 배가 고픈 나머지 추로스를 파는 츄레리아도 보여서 한입 사 먹었다.
그렇게 주전부리를 사 먹고 돌아다니는데 B 군이 갑자기 와보라며 소리쳤다. 시내의 메인 광장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는데 왜인지 모르게 사람들이 벽에 매달려 있었다.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어떤 스페인 아저씨가 나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아가씨, 지금 이 신발을 걷고 뛸 거예요? 그 신발로는 절대 안 될 것 같은데
운동화도 아닌 삼선 슬리퍼를 신고 있던 나는 너무 의아했다. 무슨 소리일까.
뒤를 보는 순간 알아챘다.. 바로 내 뒤에서 소가 달려오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황당한 일이지...
뛰지 않을 거면 지금 당장 매달리라는 아저씨의 외침에 난 서둘러 다른 사람들처럼 가게의 펜스를 붙잡고 벽을 타기 시작했다. 슬리퍼고 자시고 체면이고 자시고 난 지금 저 황소에 뿔에 죽을 수는 없는 거다.
티비에서 스페인사람들이 황소를 보면서 달리기 하는 걸 본 적은 있지만 난 미쳤다고만 생각했지 그 현장에 내가 있을 거라곤 상상은 못 했다.
펜스를 붙잡고 있으면 몇 마리의 황소들이 길거리를 달리고 있었고 뒤이어 황소와 달리기 시합을 하는 진짜 선수들도 볼 수 있었다. 정말 일말의 안전장치 없이 현장 가까이에서 황소가 달리는 걸 볼 줄이야... 계속해서 내가 보고 있는 광경을 의심하며 나도 모르게 난 축제를 즐기고 있었다. 사람들의 환호와 열기. 이 영화 같은 순간이 묘하게 나의 심장을 뛰게 만들었다.
소는 점점 늘어나고 달리기 선수들도 계속 늘어나기 시작했다. 축제는 이제 시작인듯했다. 내가 시내에 나온 목적은 저녁을 먹기 위함이었는데 아무리 둘러봐도 열려있는 슈퍼나 카페, 레스토랑이 없어 보였다. 내 앞으로는 황소와 사람들이 달리고 있고 난 여전히 펜스에 매달려 있는데 이러다가는 황소에 치이는 것보다 배고파서 아사할 것 같았다. 계속 매달려 있자니 팔도 너무 아파서 적당히 레스토랑 같아 보이는 곳으로 들어가 보았다.
축제가 언제 끝나는지라도 알고 싶어 한 아주머니께 영어로 물어보았으나 영 소통이 되지 않았다. 이렇게 아사할 순 없으니 바디랭귀지로 손목시계를 만들어 "When!!!"이라고 갈구해 보았으나 여전히 그들은 축제 모드일 뿐 나의 간절함은 닿지 않는 듯했다. 영어도 통하지 않는 스페인의 시골마을에서 내가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다.
hambre 암브레! (배고파요)
스페인에 오기 전부터 여행회화에서 기억한 단어.. 배고파요.
내가 할 수 있는 최후 발악이었는데 이걸 들은 뒤에 계시던 한 아주머니가 갑자기 날 부르셨다.
테이블에는 빵과 초리소(스페인식 소시지), 치즈와 와인이 있었는데 친구분들과 저녁을 드시는 중이셨고 그 자리에 나를 초대해 주시는 것이었다. 얼떨결에 그들의 저녁식사 테이블에 앉아 빵을 우걱우걱 먹기 시작했고 정말 너무 배고파서 싹싹 먹었다. 먹는 내내 맛있어요! 맛있어요! 를 연발하니 아주머니와 그 일행분들이 나를 귀여워해주셨다. 순례를 하냐고 물어보셔서 그렇다고 대답한 후 너무 감사한 마음에 현금을 내밀었는데 그분들은 한사코 거절하셨고 대신 나의 순례길을 응원해 주셨다.
밥을 다 먹고 그분들과 사진까지 찍었고 축제를 구경하기 좋은 스팟까지 추천해 주셨다. 밖에 나와 보니 여전히 소들은 거의 10마리로 늘어난 채 달리고 있었고 무대에 밴드공연까지 축제의 절정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조금 어두워질 때에는 커다란 인형이 나타나 길거리를 메우고 있었고 소 달리기 때문에 피하느라 잠시 헤어졌었던 B 군도 다시 만났다.
푸엔테 라 레이나의 하루는 다이내믹했다.
오늘 하루는 힘든 감정이 차올랐다가, 갑자기 달려오는 소를 피했다가
아무런 이유 없이 말 한마디 못하는 동양인에게 와인과 빵을 내밀어주던 사람들까지 만났던 날이다.
오늘 하루 산을 넘고 힘들게 걸었어도 내가 까미노에 온 이유는 그래 바로 이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