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아람 Jul 30. 2022

내가 세상에서 사라지는  마법의  두 시간


"엄마, 배고파~"

6시가 조금 넘은 시간 집에 들어서는 내게 막내딸이 건네는 인사말이다. 서둘러 저녁을 준비한다. 식사 후 딸은 티브이로 내가 보기엔 정신없고 썰렁한데 왜 보나 싶은 동영상을 찾아보며 낄낄거린다.


30분쯤 지나면 중2 둘째 딸이 "엄마 배고파~"를 외치며 들어온다.

"오늘 어땠어? 친구들이랑 별일 없었어?"

"이응"

오른손에는 젓가락, 왼손에는 휴대폰을 손에 들고 친구와 카톡을 하며 밥을 먹느라 내 얘기는 들은 척 만 척.

매일 붙어 다니는 단짝과의 대화 사이에 내가 낄 틈은 없어 보여 슬그머니 일어선다.


그리고 또 30분쯤 지나면 고1 아들에게서 전화가 온다.

"엄마 저 지금 집에 가고 있어요. 엄청 배고파요."

아들 역시 오른손에는 젓가락, 왼손에는 휴대폰. 나와 마주 앉아 있을 때는 좀처럼 보기 힘든 환한 웃음을 짓고 있다. 동영상 속 누군가가 아들을 웃게 해주는 시간을 방해할 수 없어 또 슬그머니 일어선다.


남편은 저녁을 먹고 들어오는 편이지만 가끔 연락도 없이 일찍 들어와서 배고프다고 할 때가 있다. 난감하다. 오랜만에 집에서 저녁을 먹겠다고 하는데 집에 먹을게 남아있지가 않다. 조금 미안하지만 라면을 끓여준다. 배를 채운 남편은 휴대폰을 들고 침대에 누워 뉴스를 본다.

다들 자신만의 세상으로 떠나버리는 저녁시간.




평일에는 이렇게 다 같이 앉아서 밥 한 끼 먹기가 힘들다. 그나마 주말에는 한두 끼 다 같이 식사를 할 수가 있는데 모두들 밥만 먹고는 각자의 방으로 들어가 버린다. 함께 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가 꽤 괜찮은 아이디어 하나를 생각해 냈다. 회사에서 회식을 하듯 우리 가족 회식의 날을 만들어 보면 어떨까? 가족 단톡방에 공지를 올렸다.

"이번 주 토요일 오후 6시에 회식하자. 중간고사 끝났으니 파티 한 번 해야지. 다들 약속 잡지 마."

"우리 회식에는 규칙이 있어. 회식은 6시부터 8시까지 두 시간 동안 할 건데 그 시간 동안 휴대폰 사용 금지, 다 먹었어도 자리에 앉아있기. 딱 두 가지야."


첫 번째 회식의 날에는 피자와 치킨 등 배달음식을 준비했다. 평소처럼 별 대화 없이 열심히 음식을 먹었고, 그렇게 배부른 상태에서 두 시간을 앉아 있기는 조금 힘들게 느껴졌다. 그래도 규칙대로 휴대폰 사용을 못하고 두 시간을 앉아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일상에 관한 대화가 이어졌다. 지금 무슨 이야기를 했었는지 기억이 안나는 걸 보면 그냥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이었고, 기분은 좋았다는 기억이 난다. 다들 나쁘지 않았는지 한 달에 한번 회식을 하자는 내 말에 동의했고, 다음부터는 각자 음식을 하나씩 준비해 두 시간 동안 코스요리처럼 먹자는 의견도 나왔다.


한 달 뒤 두 번째 회식의 날에는 남편의 생일을 겸한 파티를 했다. 나는 월남쌈과 꽃갈빗살 구이를 준비했고, 남편은 둘째가 친구들과 맨날 먹으러 다니면서도 해달라고 요청한 마라탕을, 아들은 약속이 있어 요리할 시간이 없다며 푸드트럭에서 다코야키를 사들고 왔다. 평소 디저트 만들기를 좋아하는 둘째는 푸딩을 만들었고, 막내는 동네 마트에서 음료를 사 왔다. 다음 주 남편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한 케이크도 준비했다.


음식이 꽤 많았는데도  두 시간 동안 다 먹어치웠다. 식사를 하면서 특별한 주제 없이 일상 이야기를 하는 것도 재미있지만, 뭔가 의미 있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나의 모닝 루틴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나의 모닝 루틴을 적은 종이 아래 각자 이름을 적고 하나씩 모닝 루틴을 정했다. 다음 날은 다들 지키려고 하더니, 그다음 날부터는 나만 하고 있다. 난 그 자리에서 가족들에게 모닝 루틴을 하겠다고 선언한 걸 지키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하고 있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그날 나는 나의 모닝 루틴을 이야기하는 것에서 끝냈어야 했다. 원래 가족 회식의 날을 하려고 한 것은 가족이 함께 하는 즐거운 시간을 위한 것이었지, 뭔가를 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내가 의미를 부여할 만한 활동을 하려고 계속 시도한다면 가족들에게는 이 날이 부담스러운 날이 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앞으로는 오직 맛있는 음식을 나누고 웃으며 서로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7월 16일은 세 번째 회식의 날이었다. 나는 풀드 포크 만들기에 도전했다. 오래전 요리 프로그램에서 전기밥솥으로 만드는 걸 봤던 기억이 나서 2킬로짜리 앞다리살 덩어리를 주문해 놨다. 앗, 오전에 검색을 해보니 20시간 이상이 걸리는 방법이었다. 급하게 블로그를 뒤졌다. 에어프라이어 1시간, 밥솥에 넣고 만능찜 기능으로 1시간 30분이면 가능한 방법을 찾았다. 간이 좀 약하게 되긴 했지만 부들부들하니 예상한 맛이 나왔다. 고기를 잘게 찢어 치즈와 양배추를 곁들여 빵에 넣어 버거를 만들고 냉장고 속 재료들을 꺼내 샐러드도 만들었다.


첫째는 마카로니와 치즈로 맥앤치즈라는 요리를 만들었고, 막내는 크로와상 생지를 와플기에 넣고 구워낸 크로플을 만들었다. 남편이 초콜릿을 녹여 크로플에 발라주었다. 디저트 담당 둘째는 미니 추러스를 만들었다.

너무 맛있어서 정신없이 먹다가 찍은 추러스

 짤주머니에 반죽을 넣어서 끓는 기름에 짜 넣으니 작은 추러스 형태로 튀겨졌다. 거기에 시나몬 가루와 설탕을 묻히니 와~엄지 척이 절로 나왔다.

"트럭 하나 사서 학교 앞에서 추러스 장사하자. 애들 난리 나겠다. 정말 맛있어!"

대화는 이제 곧 시작될 여름방학 스케줄에 관한 이야기, 8월에 가족여행 가기로 한 속초 호텔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이번 방학 동안 점심은 너희들이 알아서 해 먹어도 되겠다는 이야기까지 즐겁게 이어졌다.


즐겁게 두 시간을 보내고 나니 치울 게 너무나 많았다. 여기저기 튄 기름과 음식물 찌꺼기, 싱크대 위에 아무렇게나 뒹굴고 있는 조리도구들과 남은 식재료들... 평소 같으면 짜증이 날 상황이었지만 웃음이 다.

"소화시킬 겸 설거지는 엄마가 다 할게. 돈 워리~"

첫째가 선곡한 '회전목마'를 흥얼거리며 즐겁게 정리를 마치고 돌아보니, 가족들은 또다시 각자의 세상으로 떠나 있었다.


조잘조잘 쉴 새 없이 떠들던 아이들이 어느 순간 방문을 닫고 마음의 문도 닫혀가는 게 아닐까 걱정이 된다면, 한 달에 한번 주말 오후 두 시간쯤은 오직 우리 가족만을 위해 존재하는 사람이 되어보면 어떨까.


가족 회식의 날 : 함께 만든 음식으로 행복을 나누는 마법의 두 시간


이전 24화 초코송이, 애봉이 그리고 송혜교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