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검진을 미루고 미루다 12월 30일로 예약을 했다. 하는 김에 대장내시경도 하기로 했다. 검사 3일 전부터 식이조절에 들어갔다. 5일 단식도 해 본 사람으로서 이 정도 식이조절은 일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예 3일간 단식을 해버릴까도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과 달리 식이조절 첫날 오후가 되자 뭔가 심하게 먹고 싶어졌다. 평소 잘 먹지도 않는 사무실 간식통을 뒤졌다. 카스타드 빵은 내가 먹을 수 있는 것이라며 두 개나 먹었다. 저녁에는 막내딸과 마지막 스팸 한 조각을 사이에 두고 젓가락 싸움을 했다.
-넌 다른 거 먹어. 엄마는 스팸하고 계란밖에 못 먹어.
-나도 다른 거 먹기 싫어.
-그래, 그럼 사이좋게 나눠먹자.
결국 반으로 잘라서 먹었다. 예전에는 식탁에 스팸이 있어도 한 조각 맛만 보는 정도였다.
다음날은 평소 먹지도 않는 점심을 챙겼다. 산책하면서 편의점에 들러 구운 계란 3개와 롤케이크를 사다 먹었다. 저녁에는 두부와 바나나, 국수를 먹었다. 국수를 먹으면서 막내딸 앞에 놓인 김치를 한 점 먹고 싶었다. 김치를 비롯해 고춧가루가 들어간 떡볶이, 부대찌개 같은 얼큰한 음식들이 생각났다.
3일째는 아침, 점심을 쌀죽이나 미음을 먹고 저녁부터는 금식하라고 적혀있었다. 그냥 하루를 굶기로 했다. 퇴근하고 집에 돌아와 7시에 병원에서 받아온 약을 마시기 시작했다. 다음날 아침 5시에도 약을 마셨다.
속을 비워내느라 잠을 잘 못 잤다.몸무게가 2kg이 빠졌다. 눈이 쏙 들어갔다. 오전 8시 30분에 병원에 도착해 기본 검진을 받은 후, 약간 식은땀이 나고 속이 울렁거려 한참을 가만히 앉아 있었다. 전에도 대장내시경을 받아 봤지만, 이번에는 유독 힘들게 느껴졌다.
내시경을 하면서 수액을 맞아서인지 수면마취에서 깨었을 때는 몸이 괜찮았다. 다행히 내 위장과 대장은 용종 하나 없이 깨끗했다. 오전 11시쯤 병원에서 나왔다. 병원에서는 첫 식사로 죽을 먹고 푹 쉬라고 했다. 하지만 모처럼 연차를 냈는데 이대로 집에 들어가 대충 죽이나 먹고 잠이나 잘 수는 없었다.
영화 '영웅'을 예매하고 극장이 있는 쇼핑몰을 갔다. 1인 샤부샤부 집에서 채소와 고기를 먹고 남은 국물에 죽을 만들었다. 병원에서 시키는 대로 죽을 먹은 거다. 뭔가 허전해서 팝콘과 음료도 사 먹었다.
저녁에는 언니가 소고기를 사준다며 나오라고 했다.
-너 왜 이렇게 살이 빠졌어? 이틀새 얼굴이 팍 늙었다야.
-그렇지? 나 이번에 정말 쓰러지는 줄 알았다니까. 진짜 힘들었어.
-네가 요새 체력이 떨어져서 그래. 많이 먹어.
소고기 3인분을 열심히 먹고, 커피에 케이크까지 먹었다. 그리고 밤에는 남편과 홍어에 묵은지, 막걸리도 약간 마셨다.
대장내시경 한다고 3일 식이조절 하고는 굶어 죽을 뻔하기라도 했다는 듯, 하루종일 열심히 먹어댔다. 그동안 단식은 도대체 어떻게 한 건지 모르겠다. 건강을 위해 단식을 한다고 생각했을 때는 잘 굶었는데, 대장 내시경을 위해 억지로 참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식욕이 엄청나게 들끓었다. 단식과 금식의 차이란 이런 것인가?
다음 날 아침, 어제 잘 먹었는데도 뭔가 허전했다. 도대체 이 허전함은 뭘까...?
밥통을 열었다. 흰쌀밥을 퍼 담았다. 김치냉장고에서 김장김치를 꺼내 썰었다. 흰쌀밥에 김치를 올려 한 입 먹었다.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그래, 바로 이 맛이야~
어제 영화 '영웅'을 보며 못 느꼈던 대한민국의 자긍심을 김치로 확인했다!
( 어제 대한민국의 자긍심을 느끼지 못한 까닭은?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아직도찾지못했다니...ㅠ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