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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아람 Jan 15. 2023

하마터면 미안할 뻔했다

뮤지컬 <물랑루즈>를 혼자 보고 와서


나는 점심시간에 밥을 먹는 대신 산책을 하면서 점심값을 적립해 두었다가 다달이 나를 위한 행사를 한다. 한 달은 금방 간다. 여차하면 한 달을 빼먹게 될 수도 있다. 최소 한 달 전에는 다음 달에 무엇을 할 것인지를 결정하고 예약을 하는 등 준비를 해야 한다.


1월에 뭘 할까 하는 고민은 12월 초에 했다. 평소 관심 있던 홍광호배우가 출연하는 뮤지컬 <물랑루즈>를 예매하려고 했으나 그가 출연하는 회차는 모두 매진이었다. 인터파크 티켓에는 예매대기 서비스라는 게 있다. 내가 신청한 자리에 취소표가 생기면 예매를 할 수 있는 서비스인데, 인기 있는 공연에는 좀처럼 취소표가 나오지 않는다.


큰 기대 없이 신청했는데 운 좋게 취소표가 한 장 나왔다. 2층임에도 15만 원이라는 가격에 약간의 망설임은 있었지만, 지금껏 하지 못했던 일을 하고자 마음먹은 돈이니 눈 감고 결제 버튼을 눌렀다.


수요일 오후 2시 공연이라 회사에 반차를 신청해 뒀다. 아침 출근길이 설렜다. 오전에 일을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퇴근했다. 물랑루즈는 2001년에 개봉했던 니콜 키드먼, 이완 맥그리거 주연의 영화로 유명하다. 나는 이 영화를 보지 않아서 제목만 알고 있었고, 줄거리모르는 상태로 갔다.


뮤지컬 물랑루즈는 줄거리는 매우 진부했으나 볼거리가 풍부하고 무대가 화려했다. 예전에 많이 들어 귀에 익숙한 팝송을 주로 넘버로 사용했는데, 이 부분에 대해 안 좋은 평이 많았다. 팝송을 우리말로 번역한 게 어색하다는 이었다. 그러나 나는 좋았다. 영어로 불렀다면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었을 것이다. 어색하게 들려도 못 알아듣는 것보다는 낫지 않은가.


그리고 왜 홍광호배우 회차가 매진인지 알게 됐다. 목소리가 정말 매력적이다. 연기를 할 때도 노래를 할 때도 그만의 색깔이 분명한 배우였다. 글을 쓰는 지금도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도는 듯하다. 세 시간이 지루할 틈 없이 지나갔다. 가만히 앉아서 보기 힘들 만큼 신나는 공연이었다.


혼자 공연을 본 것의 단점은 감동을 나눌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정말 재밌었지?

-응, 정말 재밌었어.

라는 말을 주고받으며 눈을 맞추고 웃을 사람이 없다는 것이 아쉬웠다.


집으로 돌아오니 딱 평소 퇴근시간이었다. 평소처럼 집안은 엉망이었다. 주방 싱크대 안에 엉망으로 뒤엉킨 음식물과 그릇들을 보자 짜증이 훅 올라왔다. 며칠 전 딸이 생일선물로 사 준 헤드셋을 쓰고 아까 본 뮤지컬에 나온 음악을 들으며 설거지를 했다. 기분이 다시 좋아졌다.


평소처럼 세탁기를 돌리고 저녁을 차렸다. 저녁을 먹고 청소기를 돌리고 설거지를 했다. 일본으로 출장 가는 남편의 가방을 쌌다. 생각해 보니 나는 회사에서 퇴근하면 집으로 출근을 하고 있었다. 급여를 받지 않으니 봉사활동인 건가.


하마터면 미안할 뻔했다. 나 혼자 좋은 공연을 보고 온 것을 미안해할 뻔했다. 가족을 위해 퇴근 없이 봉사하는 난 그걸 누릴 자격이 충분한 사람이다. 다음 달에도, 그다음 달에도 미안해하지 말고 나를 위한 행사를 하자. 내가 행복해야 가족들도 행복하다. 고로, 이 행사는 나보다 가족을 위한 이다.



보고 있나... 남편?

관심 없는 척하면서 몰래 보는 거 다 안다.

이 글에서 가장 중요한 건 뭐?

다~~ 가족을 위한 일이다!



https://brunch.co.kr/2022년에 했던 나를 위한 행사


https://brunch.co.kr/산책을 시작하게 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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