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점심시간에 밥을 먹는 대신 산책을 하면서 점심값을 적립해 두었다가 다달이 나를 위한 행사를 한다. 한 달은 금방 간다. 여차하면 한 달을 빼먹게 될 수도 있다. 최소 한 달 전에는 다음 달에 무엇을 할 것인지를 결정하고 예약을 하는 등 준비를 해야 한다.
1월에 뭘 할까 하는 고민은 12월 초에 했다. 평소 관심 있던 홍광호배우가 출연하는 뮤지컬 <물랑루즈>를 예매하려고 했으나 그가 출연하는 회차는 모두 매진이었다. 인터파크 티켓에는 예매대기 서비스라는 게 있다. 내가 신청한 자리에 취소표가 생기면 예매를 할 수 있는 서비스인데, 인기 있는 공연에는 좀처럼 취소표가 나오지 않는다.
큰 기대 없이 신청했는데 운 좋게 취소표가 한 장 나왔다. 2층임에도 15만 원이라는 가격에 약간의 망설임은 있었지만, 지금껏 하지 못했던 일을 하고자 마음먹은 돈이니 눈 딱 감고 결제 버튼을 눌렀다.
수요일 오후 2시 공연이라 회사에 반차를 신청해 뒀다. 아침 출근길이 설렜다. 오전에 일을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퇴근했다. 물랑루즈는 2001년에 개봉했던 니콜 키드먼, 이완 맥그리거 주연의 영화로 유명하다. 나는 이 영화를 보지 않아서 제목만 알고 있었고, 줄거리는 모르는 상태로 갔다.
뮤지컬 물랑루즈는 줄거리는 매우 진부했으나 볼거리가 풍부하고 무대가 화려했다. 예전에 많이 들어 귀에 익숙한 팝송을 주로 넘버로 사용했는데, 이 부분에 대해 안 좋은 평이 많았다. 팝송을 우리말로 번역한 게 어색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좋았다. 영어로 불렀다면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었을 것이다. 어색하게 들려도 못 알아듣는 것보다는 낫지 않은가.
그리고 왜 홍광호배우 회차가 매진인지 알게 됐다. 목소리가 정말 매력적이다. 연기를 할 때도 노래를 할 때도그만의 색깔이 분명한 배우였다. 글을 쓰는 지금도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도는 듯하다. 세 시간이 지루할 틈 없이 지나갔다. 가만히 앉아서 보기 힘들 만큼 신나는 공연이었다.
혼자 공연을 본 것의 단점은 감동을 나눌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정말 재밌었지?
-응, 정말 재밌었어.
라는 말을 주고받으며 눈을 맞추고 웃을 사람이 없다는 것이 아쉬웠다.
집으로 돌아오니 딱 평소 퇴근시간이었다. 평소처럼 집안은 엉망이었다. 주방 싱크대 안에 엉망으로 뒤엉킨 음식물과 그릇들을 보자 짜증이 훅 올라왔다. 며칠 전 딸이 생일선물로 사 준 헤드셋을 쓰고 아까 본 뮤지컬에 나온 음악을 들으며 설거지를 했다. 기분이 다시 좋아졌다.
평소처럼 세탁기를 돌리고 저녁을 차렸다. 저녁을 먹고 청소기를 돌리고 또 설거지를 했다. 일본으로 출장 가는 남편의 가방을 쌌다. 생각해 보니 나는 회사에서 퇴근하면 집으로 출근을 하고 있었다. 급여를 받지 않으니 봉사활동인 건가.
하마터면 미안할 뻔했다. 나 혼자 좋은 공연을 보고 온 것을 미안해할 뻔했다. 가족을 위해 퇴근 없이 봉사하는 난 그걸 누릴 자격이 충분한 사람이다. 다음 달에도, 그다음 달에도 미안해하지 말고 나를 위한 행사를 하자. 내가 행복해야 가족들도 행복하다. 고로, 이 행사는 나보다가족을 위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