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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아람 Jan 24. 2023

이제 싸우지 말고 만두는 사 먹어요


설 전날 오후였다. 명절음식이 지겨워질 것을 대비해 점심으로 짜장면과 탕수육을 배불리 먹고 시댁을 갔다. 남편과 어머니, 나 셋이서 전을 부치는데 졸음이 쏟아졌다. 프라이팬에 코를 박을 것 같았다. 둘째 딸을 불렀다.

-엄마 10분만 눈 좀 붙이고 올 테니까 여기 앉아서 이것 좀 뒤집고 있어.

소파에 벌러덩 누웠다. 잠시 후에 목욕하러 갔던 형님이 왔다. 인사를 하고 다시 누웠다. 형님, 어머니, 남편이 도란도란 이야기를 하는 소리가 들렸다.

'분위기 좋네. 내가 안 가도 되겠어'

마음 편히 계속 잤다. 눈을 떠보니 전 부치기가 끝나 있었다.


남편이 내게 구시렁거렸다.

-10분만 잔다며? 자기가 안 와서 엄마가 계속 일 했잖아.

-나 일부러 안 간 거야. 오랜만에 세분이 다정하게 이야기하는데 내가 안 끼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말이지~


결혼 18년 만에 처음으로 전을 안 부쳤다. 차례도 안 지내는데 어머니는 꼭 명절 전날 일찍 와서 전을 부치라고 하셨다. 지난 추석에 나와 아이들이 코로나에 걸려 못 가게 되자, 그다음 주에 와서 전을 부치라고 하셨다.


전은 먹기 직전에 조금만 부쳐서 먹고 끝내자고 몇 번 말씀드리기도 했었다. 알았다고 하시고는 다음번 명절 전날이 되면 또 말씀하신다.

-전 부칠 거 준비해 놨으니까 일찍 와라.

어쩌면 그 말은 '보고 싶으니까 빨리 와라'라는 의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 '보고 싶다'에 나는 포함이 안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명절 때마다 시댁에서 1박 2일 머무는 동안 밥을 차리고 설거지를 하는 건 늘 나 혼자의 몫이었다. 남편, 형님은 시부모님과 함께 티브이를 보면서 웃고 있는데 나 혼자 설거지를 하고 나면 기분이 상했다. 빨리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이번에는 나도 명절을 즐겨보자 싶었다. 그래서 전 부치다 졸리다고 잠을 잔 거고, 설거지도 남편과 함께 했다. 밤에는 남편과 근처 카페에 가서 차를 마셨다. 들어오는 길에 맥주를 사 와 영화를 보며 마셨다. 그동안 나는 며느리라서 해야만 한다는 혼자만의 의무감 같은 게 있었다. 그런 의무감 따위 털어버리자 마음먹었다.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 하고 싶은 만큼만 하기로 했다.


설날 아침에 떡국을 끓였는데 만두가 다 터졌다. 엄청 크고 투박하게 빚은 만두였다. 부모님이 만두를 직접 만드셨는데 만두피가 두껍네, 얇네 하면서 만드는 중에 두 분이 싸우셨다고 한다.

-이 만두피가 얇아서 터진 거냐?

-더 두껍게 해야 된다니까!

떡국 먹다 말고 만두 이야기로 또 싸움이 나려는 순간이었다. 남편이 가볍게 정리했다.

-이제 힘들게 만두 하지 마. 사 먹는 게 맛있어.


설 다음날에는 친정을 다녀왔다. 엄마는 이번 명절에는 힘이 드니, 갈비와 떡국에 김치만 놓고 밥을 먹자고 했었다. 막상 가보니 갈비 외에도 전을 부치고 묵을 쑤고 잡채를 해놨다. 떡국 끓일 사골 국물도 손수 고아놓고 만두도 빚어놨다. 식혜도 만드셨다. 이 음식들은 당일 먹을 것뿐만 아니라 자식들 싸줄 것까지 포함해서다.


우리 가족과 언니네, 동생네, 오랜만에 이모 가족까지 모두 와서 스물두 명이 모였다. 일 할 사람이 많아서 서로 설거지를 하겠다고 싸웠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눈치 없어 보였던 올케는 어느새 엄마의 말 한마디에 벌떡벌떡 일어선다. 시댁에서는 저런 모습인 내가, 친정에 오니 엉덩이가 무거워졌다.




-자기야, 장모님이 싸 준 만두 어떤 거야?

남편이 냉동실 문을 열고 물었다.

-거기 끝에 있는 거. 우리 엄마 만두가 더 맛있지?

-우리 엄마 만두도 맛있다, 뭐. 그리고 지금 편 가르는 거야? 그러면 나 섭섭해~

-아니~맛없다는 게 아니라 사실 좀 퍽퍽하잖아. 히히. 어머니가 이제 다시는 만두 안 만드신대.

-아닐걸. 내년에 또 만들걸.

내 생각도 그렇다. 엄마들은 이제는 힘들어서 못하겠다 하면서도 막상 명절이 되면 상상 이상의 음식을 만들어 두곤 하신다.


설날 아침에 시부모님이 싸우실 뻔해서 아무 말 못 했지만, 사실 만두피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어머니가 만드신 모든 음식이 정말 맛있지만, 만두는 별로다. 십수 년을 먹어보고 감히 말씀드린다.

-어머니, 만두 만든다고 아버님이랑 싸우고 고생하지 마시고, 이제부터 만두는 사 먹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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