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는 서대문구청에 근무하는 공무원이었다. 아빠는 친구에게 돈을 빌려주고는 받지 못하고, 몸이 아픈데도 친구가 좋아 술을 마시고 다녔다고 한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언니와 내가 전화기 아래 저금통에서 몰래 동전을 빼내 아이스크림을 사 먹다가 들킨 적이 있다. 아빠는 우리를 불러 놓고 종아리 한대를 살짝 때렸다. 나는 엉엉 울었다. 그 모습이 마음 아팠던 아빠는 지폐를 꺼내 주며 아이스크림을 사 오라고 하셨다. 그때 외에는 아빠한테 혼난 기억이 없다. 혼내는 건 늘 엄마 몫이었다.
몸이 아파 몇 년째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던 아빠가 돌아가신 건 초등학교 6학년이 되던 해 봄이었다. 진달래꽃이 한창인 산에 아빠를 묻었다. 서른여섯 살의 엄마와 열네 살, 열세 살 여자아이, 아홉 살 남자아이만이 집으로 돌아왔다.
엄마는 아이들을 돌봐야 한다는 이유로 직장보다는 집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택했다. 손재주가 좋았던 엄마는 한복을 배우러 다녔다. 그리고 일 년 뒤에 한복점을 할 만한 가게가 딸린 집으로 이사를 했다. 결혼, 회갑연, 명절 등에 한복을 하나씩 해 입던 시절이었다. 일감이 밀려들 때면 엄마는 잠을 잘 못 자 졸다가 손가락을 박기도 했고 장이 꼬여 구급차에 실려가기도 했다.
아빠는 여덟 명의 형제 중 막내였다. 푼수 같은 큰어머니 한분이 엄마 앞에서 '자식들 결혼상대 고를 때 어미아비 없는 자식은 쳐다도 보면 안 된다. 뭐가 달라도 다르다.'는 막말을 했다고 엄마가 노발대발했다. 그리고 사업을 하던 큰아버지는 사업 자금이 필요하다며 아빠 앞으로 돼있던 땅을 달라고 했다. 엄마는 땅을 줄 테니 아이들도 다 데려가라고 악을 쓰며 뺏기지 않았다. 아빠의 형제들은 도와주기보다는 빼앗으려 했고, 위로 보다는 상처를 주는 사람들이었다.
그 후로 엄마는 우리가 조금만 잘못해도 불같이 화를 냈다. '어디 가서 아비 없는 자식 소리 들을까 겁난다'는 게 이유였다. 엄마의 노력 덕분에 나는 남들에게 '아비 없는 자식이라서'라는 말은 듣지 않고 자랐다. 내게 그런 말을 한 사람은 엄마뿐이었다.
언제부터인가 아빠 얼굴은 해마다 제사상 위에 올리는 액자 속 얼굴로만 떠올랐다. 하지만 아빠가 퇴근하면서 들고 온 봉투 안 핫도그에서 나던 향긋한 기름냄새를 기억한다. 내가 상장을 받아오면 나를 번쩍 들어 올려 주며 환하게 웃던 모습을 기억한다. 어느 겨울 눈 내린 날 잡았던 아빠의 따뜻했던 손을 기억한다. 삶이 힘들고 지칠 때마다 나를 일으켜 세운 것은 그런 것들이었다.
그렇게 아빠는 영원히 좋은 사람으로 잠들었고, 엄마는 차갑고 독한 사람으로 살아가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