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동지(12월 22일, 음력 11월 10일)에, 팥죽을 좀 사다 먹어볼까 싶었다. 퇴근길에 시장 안 팥죽집에 들렀는데, 줄이 시장 골목을 채울 만큼 길었다. 추운 날씨에 팥죽 한 그릇 사려고 줄을 설 만큼 절실하지는 않아서 그냥 포기하고 집으로 왔다.
팥죽은 내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음식 중 하나였다. 동지에 팥죽을 먹는 건 붉은색이 액운을 쫓는다는 오래된 미신에서 비롯된 것인데, 부모님은 요즘 세상에 그런 게 뭣이 중하다고 그렇게 동지 팥죽을 먹이려고 하셨던 걸까? 팥죽은 어릴 때 엄마가 먹으라고 해서 억지로 먹었던 음식이었고, 결혼한 후에는 시어머니까지 팥죽을 해주시는 바람에 동짓날이 달갑지 않았다.
몇 해 전부터는 친정엄마도, 시어머니도 동짓날이니 팥죽을 먹으러 오라는 연락을 하지 않으신다. 그래도 하나도 아쉽지 않았고, 동지가 언제인 줄도 모르고 지나가곤 했다. 그런데 지난 동지에 갑자기 팥죽을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못 먹은 팥죽이 가끔 눈앞에 아른거렸다.
엊그제 일이 있어 외출했다가 돌아오는 길에 동네 칼국수집 앞을 지나갔다. 메뉴판에 팥죽, 팥칼국수라고 써진 게 보였다. 잠시 망설이다가 안으로 들어갔다. 새알심이 들어간 팥죽을 먹을까, 팥칼국수를 먹을까 고민하다가 여긴 칼국수집이니 팥칼국수가 더 맛있을 것 같았다.
"저, 팥칼국수 하나 주세요."
팥칼국수 주문과 동시에 기계에 반죽을 넣고 면 뽑는 소리가 들린다. 서빙하는 분이 친절하게 다가와 셀프코너에 가서 보리밥을 가져다 먹으라고 알려주신다. 밥통에서 보리밥을 퍼담고 열무김치와 고추장, 참기름을 넣고 쓱쓱 비벼 한 그릇을 먹고 나니, 내가 주문한 팥칼국수가 나왔다.
국물을 한 스푼 떠 입에 넣었다.
'앗, 뜨거워!'
이미 입에 넣은 걸 다시 뱉을 수도 없고, 입에 물고 있자니 입천장이 다 까질 것 같아 급하게 꿀꺽 삼켰다.
'으윽.'
목구멍에 불덩이가 지나간다. 얼른 물컵을 들어 불을 껐다.
호호 불어서 천천히 먹어야지. 어릴 때는 설탕을 넣고도 겨우겨우 삼키던 맛없는 팥죽이, 이제는 고소하다. 푸근하게 허기를 달래주는 느낌이다. 혼자 먹는대도 외롭지 않았다.
어릴 적 어느 동짓날이 떠올랐다. 커다란 그릇에 잔뜩 불려져 있던 팥, 작고 동그랗게 빗던 새알심, 오랫동안 부엌에 서서 냄비 속을 젓던 엄마의 모습, 숟가락으로 뒤적거리고만 있는 나를 보는 엄마의 눈빛... 마치 지금 내 앞에 엄마가 앉아 계신 듯하다.
"동지 팥죽을 먹어야 안 아프고 겨울을 잘 보낼 수 있는 거야."
"팥죽을 먹어야 나이 한 살 더 먹는 거야."
설날에 떡국을 먹어야 나이 한 살 더 먹는 건데 엄마는 왜 그런 말을 했을까? 나는 이제야 그게 궁금해 찾아봤다. 예전에는 동짓날을 '작은 설'이라 하여 설날에 떡국을 먹듯이 동짓날에는 자기 나이만큼 새알심을 넣은 팥죽을 먹어야 한 살을 더 먹는다고 믿었다고 한다.
난 아무래도 그동안 팥죽을 잘 안 먹어서 아직 철이 안 들었나 보다. 팥죽 맛을 알게 됐다는 건 어쩌면, 이제 철 들 준비가 조금은 됐다는 증거가 아닐까.
혼자 팥칼국수를 먹다가 엄마가 끓여준 팥죽이 생각났다는 이야기를 엄마한테 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 엄마는 또 힘들게 동지 팥죽을 끓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