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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아람 Mar 17. 2023

우리 집에는 막 퍼주는 편의점이 있다


휴대폰 잠김 시간인 8시 30분 이전에는 나랑 눈도 잘 마주치지 않는 초3 막내딸이 8시 30분이 되자 나에게 와서 말했다.

"엄마 책 그만 읽어. 나랑 놀자."

"너도 책 봐. 엄마 계속 일하다가 방금 책 편 거야."

"싫어. 난 엄마 책 읽는 거, 글 쓰는 거 다 싫어. 내 말도 안 들어주고 다 무시하잖아."

"그건 무시하는 게 아니라 너무 집중해서 못 듣는 거지."

"책 그만 읽어. 나 심심해."

할 수 없이 책을 덮었다.

"뭐 하고 놀까? 그림 그릴래?"

그림을 그린다고 하면 난 옆에서 책을 읽을 수 있다.

"편의점 놀이 하자."

"그래..."

천천히 침대를 벗어나 느릿느릿 거실로 나갔다.


얼마 전에 딸과 함께 서점에 갔다. 딸은 읽는 책 대신 만드는 책을 샀다. 편의점에서 파는 과자, 라면, 유제품 등의 포장지와 내용물이 인쇄된 종이들을 오려서 실물 모형으로 만들 수 있는 책이었다. 완성품의 크기는 실제보다 작았지만 모양은 비슷했다. 봄방학 내내 열심히 만들어서 집안에 편의점을 차렸다.


딸의 편의점에 가서 라면과 과자, 요구르트를 샀다. 딸이 종이에 영수증이라 적고 라면 1200원, 과자 1350원, 요구르트 1200원... 그리고는 한참을 멈춰 있다.

"저기요, 계산이 너무 오래 걸리네요. 여긴 참 불편한 편의점이로군요?"

"기다려요."

한참만에 계산을 끝낸 딸에게 카드를 주고 말했다.

"배달되죠? 저기 1호실로 배달해 주세요."

나 쫌 진상 고객인 듯.

곧바로 내방으로 들어가 누웠다. 난 누워서 책 보는 게 좋아, 역시 노는 건 피곤해.


딸이 한참만에 작은 상자를 들고 배달기사가 되어 나타났다.

"저는 라면, 과자, 요구르트만 샀는데 뭐가 이렇게 많죠?"

"김밥, 콜라, 나머지 과자는 다 서비스입니다."

"네에~? 정말 친절한 편의점이군요. 엄마 책 한 권 써야겠다. 제목은... '막 퍼주는 편의점'이야. 편의점 주인이 계산은 엄~청 느린 대신 서비스를 막 퍼주는데, 사람들은 그 음식을 먹으면서 막~ 행복해지는 거야."

그 말을 하면서 나도 기분이 좋아졌다.

"엄마, 그거 불편한 편의점 짝퉁이잖아."

"너무 티 나지? 큭큭"


상자에 담긴 음식들을 하나하나 꺼내 먹는 시늉을 하며 탄했다. 

"와~이거 진짜 같다, 정말 잘 만들었어."

이거 만들 땐 어디가 힘들었고 어려웠는데 어떻게 해결했는지 신이 나서 설명하는 딸의 얼굴이 반짝거렸다. 그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워 볼을 살짝 꼬집으며 웃었다.


최근에 나를 위한 선물, 나만의 시간이 필요하다며 혼자 여행을 다녀오고 뮤지컬을 보러 다녔다. 그 시간들이 과연 지금 이 짧은 순간 보다 나를 더 행복하게 해 주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 눈앞에 이렇게 반짝이는 선물이 있는데 난 또 뭐가 그렇게 필요하다고 헤매고 다니는 건지, 딸이 내게 원하는 이 잠깐의 시간을 선뜻 내주지 못한 것이 미안한 밤이었다.


딸이 만든 편의점
곧 오픈할 패스트푸드점
이건 진짜 먹을 수 있는 거, 발렌타인데이 다음 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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