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아람 Mar 31. 2023

술김에 충동구매 한 행운의 부적


"사장님, 여기 500 두 잔이랑 먹태 주세요~"

거품이 2.5cm 정도 올라간 황금빛 맥주와 잘게 찢어진 먹태, 청양고추를 송송 썰어 넣은 마요네즈 소스가 테이블 위에 올려진다. 손잡이를 꽉 잡아 잔을 들고 목구멍을 최대한 벌려 벌컥벌컥 맥주를 밀어 넣는다. 먹태에 소스를 듬뿍 찍고 청양고추를 한 조각 올려 는다. 고소하고 부드러운 마요네즈와 매콤한 고추가 퍽퍽한 먹태와 어우러진 환상의 궁합, 어떤 고급요리 부럽지 않은 행복감을 준다.

"아, 살 것 같다."

서너 번의 반복으로 잔이 비워졌다.

"사장님~~ 여기 500 한잔 더 주세요."

삼십 분 만에 두 잔을 비웠다.


오후 일곱 시가 조금 넘은 시간, 하루 종일 내가 먹은 거라곤 돈가스와 물 한잔, 커피 한잔뿐이었다. 아침 일찍 집을 나서 언니를 만나 병원을 들렀다 백화점에서 쇼핑을 하고 대학로에서 공연을 봤다. 평소보다 물을 마시지 못하고 돌아다녔기에 배고픔 보다 갈증이 심했다. 고로 나는 술을 마시는 게 아니라 수분을 보충하는 중이다.


지나친 수분 보충으로 마음까지 촉촉해져 옛이야기를 꽃피우기 시작했다. 언니가 모두의 만류를 뿌리치고 대기업을 때려치우고 이런저런 일들을 겪다가 들어간 직장에서 형부를 만난 이야기를 했다. 우리의 삶은 정해진 운명의 힘이 있고 결국은 그걸 향해 나아가는 과정인 것 같다는 철학적인 대화를 나눴다. 


네 번째 술잔을 거의 비웠을 때, 가게 안으로 한 남자가 들어왔다. 손님인 줄 알았는데 우리 쪽으로 다가와 팔찌를 잔뜩 두른 손목을 내밀었다. 그는 팔찌와 머리끈을 팔고 있었다. 집에서 직접 구슬을 꿰어 만들었다는 그 팔찌는 언니와 내가 하기엔 너무 반짝거렸다. 살 생각 없었는데 그 남자가 한 팔찌를 보여주며 말했다.

"이 팔찌, 이거는 제 딸도 하고 다녀요."

딸한테 사다 주라는 얘기겠지. 피식 웃음이 나왔다.

"팔찌 말고 머리끈은 얼마예요?"

"한 개 오천 원, 세 개 만원입니다."

"요거 요거 요거 세 개 주세요."


내가 피식 웃은 이유는, '나 오늘 이 사람 만날 운명이었나 봐'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날 낮에 대학로를 돌아다니며 막내딸에게 줄 머리끈을 사려고 했다. 긴 머리를 풀고 다니는 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날이 더워지자 머리를 묶어달라고 했다. 전에 쓰던 알록달록한 머리끈들이 다 어디론가 사라져 검정 고무밴드로 묶어줬었는데 시내에 나온 김에 사가려고 했다.


첫 번째 들른 액세서리점에서는 사정이 있어 아이용 머리끈을 며칠 빼놓았다고 해서 사지 못했다. 한참 돌아다니다 찾은 두 번째 가게에서 보니 머리끈 하나에 4~5천 원이었다. '뭐가 이렇게 비싸, 잃어버리면 아깝겠다, 우리 딸은 잘 잃어버리니까 인터넷으로 싼 거 여러 개 주문해 주는 게 나을 거야'라는 결론으로 사지 않고 그냥 나왔었다.


낮에 내게 그런 일이 있었던 걸 알리 없지만 딸을 위해 하나 사 가라고 말하는 남자, 500cc 맥주잔을 네 잔이나 비우고 그 머리끈이 그 정도의 가치가 있는지 계산이 안 되는 나, 이 거래가 썩 마음에 들지 않지만 조카를 위해 지갑을 연 언니까지, 이건 운명적인 만남이 분명했다.



다음 날 아침에 딸의 머리를 묶어주려고 가방에서 머리끈을 꺼냈다. 세 개에 5천 원이면 딱 좋을 정도의 머리끈을 만원에 샀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했을 때는 내 생각을 바꾸면 된다. 이 머리끈에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가치, 이야기를 만드는 거다. 딸의 머리를 빗기며 말했다.

"엄마가 사 온 머리끈 예쁘지?"

"어" (휴대폰을 보며 영혼 없는 목소리로)

"이거 파는 아저씨가 그러는데 여기 달린 구슬이 행운의 구슬이래. 오늘 이걸로 머리 묶고 나가면 좋은 일 있을 거야."

"뻥 치지 마."

이런, 열 살이 되더니 더 속이기가 힘들어졌다.

"아냐. 정말이야. 이따가 저녁때 오늘 어떤 행운이 있었는지 꼭 얘기해 줘."


저녁때 딸에게 물었다.

"오늘 좋은 일 있었지?"

"아니, 아무 일도 없었거든~"

"거봐.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게 좋은 일인 거야. 넌 잘 모르겠지만."


저녁을 먹고 나서 전날 마신 술로 피곤해 비몽사몽 하고 있을 때 막내딸이 다가와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 아빠가 회 사 온대. 오늘 행운의 날이야."

"거봐. 엄마 말이 맞았지?"

소소한 일상이 행운임을 깨닫게 해 준, 이것은 머리끈이 아니라 행운의 부적인 것 같다.





매거진의 이전글 우리 집에는 막 퍼주는 편의점이 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