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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아람 Apr 14. 2023

늙은 아내의 감쪽같은 복수


금요일 밤늦게 남편과 한강으로 데이트를 갔다. 차 안에서 캔맥주를 마시며 설레는 내 마음과 달리 남편은 날 보고 '늙었다'는 말을 던지는 대참사를 저질렀다. 나 복수할 거야~~ 시커먼 강물 속에서 튀어나온 괴물이 되어 주말 동안 남편을 괴롭혀 주리라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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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에서 집으로 가는 길 이십여분, 뜨뜻한 자동차 시트 탓인지 맥주를 마신 탓인지 그 짧은 시간에 깜빡 잠이 들었다. 주차장에 도착해 잠이 깬 나는 입을 벌리고 침까지 흘리고 있음을 인지했다. 슬쩍 침을 닦아내고는 "아, 되게 피곤하네." 하고 웃으면서 차에서 내렸다.


춥다며 남편한테 딱 달라붙어 집에 들어와서야 생각났다. 내가 복수를 다짐했다는 사실을... 잠깐 졸고는 그걸 까먹다니!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니 복수를 꼭 화내면서 할 필요는 없다. 화내지 않고 웃으면서 남편에게 복수해야겠다. 그 조차 복수 당한다는 것을 알 수 없도록 감쪽같이!



토요일 아침,  자고 싶은 내게 와 밥 달라는 막내딸에게 속삭였다.

"까르보나라 먹고 싶지 않니?"

우리 집 파스타 요리사는 남편이다.

"아빠, 나 까르보나라 먹고 싶어. 빨리 일어나. 배 고파."

딸이 남편을 깨웠고 나는 잠을 더 잤다. 이게 내 첫 번째 감쪽같은 복수다.


오후에 남편에게 쇼핑 링크를 하나 보내고 말했다.

"자기야, 나 이거 사줘. 콜라겐 크림. 나 요새 너무 늙었어."

"안 늙었어."

"늙었다며? 어제 한강에서 그랬잖아."

"그건 처음 만났을 때보다 그렇다는 얘기지."

"그래도 나 그것 때문에 신경 쓰이니까 화장품 사야겠어. 그리고 앞으로 늙었다는 말 할 때마다 화장품 하나씩 살 거야."

이것은 상대의 잘못을 이용해서 이득을 챙긴 두 번째 감쪽같은 복수!


저녁으로 뭘 해 먹나 고민하고 있을 때 둘째 딸이 말했다.

"아빠, 나 감바스 먹고 싶어. 아빠가 해주는 감바스 맛있어."

둘째 딸이 나의 세 번째 감쪽같은 복수를 도와줬다. 남편이 올리브유에 채소와 새우를 넣고 끓인 감바스와 구운 빵으로 저녁을 준비하는 동안 나는 누워서 어제 못 본 드라마 '모범택시'를 봤다. 모범택시는 복수 대행 서비스 업체 무지개 운수에서 나쁜 놈들에게 통쾌한 참 교육을 하는 내용이다. 내 남편 참 교육은 내가 직접 한다. 절대 티 나지 않게, 감쪽같이.


밤 열 시쯤 남편이 은근한 눈빛을 보내며 말했다.

"우리 와인 한 잔 할까?"

"어 좋아. 지윤이 재우고 올게. 딱 기다려."

막내딸 옆에 누웠다. 딸은 잘 생각이 없는지 계속 조잘댄다. 딸보다 내가 먼저 잠이 들었다.


한 시간쯤 지나 남편이 자는 나를 흔들며 말했다.

"자기야, 자기야, 와인 안 마셔?"

"어 나.. 5분만 있다 나갈게..."

나는 7시간 5분 뒤에 일어났남편은 혼자 와인을 마시고 드라마를 보며 외로운 토요일 밤을 보내야 했다. 이 네 번째 복수는 너무나 감쪽같아서 나 조차도 나중에야 깨달았다.



일요일에는 친정 식구들과 아버지 산소에 가서 잡초를 뽑고 떼를 사다가 새로 심었다.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장인의 무덤을 정돈하느라 땀을 뻘뻘 흘리며 열심히 일하는 남편의 모습에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밤에 자기 전에 남편이 등을 긁어달라고 했다. 넙데데한 등짝을 박박 긁어주는데 남편이 물었다.

"나 머리 뒤쪽 휑하지?"

이번에야말로 진짜 복수할 기회가 왔다. 남편이 보지 못하는 뒤통수가 얼마나 휑한지 알려주면 남편이 내게 늙었다는 말을 했을 때 내가 얼마나 속상했을지 깨닫게 될 것이다. 하지만...

"아니, 별로 티 안 나. 그리고 자기 머리숱까지 많으면 너무 멋져서 내가 불안해. 지금 딱 좋아."

나는 거짓말을 했다. 남편에게 사실대로 말해주면 당장은 통쾌할 수 있겠으나 남편이 자신감 떨어지고 속 상해하는 건 내게도 좋지 않다. 남편의 기분이 좋아야 아이들 파스타도 만들어주고 나한테 선물도 사주고 일도 열심히 하겠지. 상대를 즐겁게 만들어 더 많이 움직이게 하는 복수, 진짜 감쪽같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는 걸 보니 내가 정말 늙었다는 거, 인정한다.


그래도 늙었다는 말을 들으면 기분 나쁘니 남편이 또 내게 그 말을 한다면 이 노래를 불러줘야겠다. "우린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익어가는 겁니다~♬" (노사연 님의 바램) 


https://youtu.be/H6Lq7Ta8EQk

노사연 님, 바램 (kbs 열린음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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