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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아람 May 30. 2023

퇴사 대신 재택근무, 내가 그린 큰 그림


  "니 내 보기 싫어서 그만둔대매?"

  내가 사직서를 냈다는 소식을 들은 사장님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부산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사장님은 사투리가 섞인 어정쩡한 서울말을 쓰는 50년생 할아버지다. 사장님은 내 또래의 딸이 있는데 딸에게 참 다정하셔서 얼굴도 모르는 그녀가 가끔 부러웠다.


  회사의 모든 결정은 사장님의 한마디에 달려있다. 사장님은 결재를 하기 위해 주 1회 정도 출근을 하고 급한 일이 생겼을 때 가끔 화를 한다. 내가 퇴사한다는 말이 사장님한테는 긴급 상황이었던 거다. 한참 동안 썰렁한 농담을 이어가던 사장님이 본격적인 협상 카드를 꺼냈다.


  "니 애 셋 키울라면 돈 많이 나간다. 딴 일 할 거 아니면 여 계속 다녀라. 어떻게 해 주면 되겠나? 3시쯤 일찍 퇴근하면 어떻겠나?"

  나를 붙잡으려는 의도가 분명하다.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한다.

   "아뇨. 제가 출퇴근 왕복 3시간 걸리는 것도 너무 힘들고요." 

  사실 편도 1시간 10분 정도 소요되고 이로 인해 남들보다 30분 늦게 출근, 일찍 퇴근하며 시외방향이라 전철 안에 사람이 없어 여유롭게 음악을 듣거나 글을 쓰는데, 그래도 힘들긴 하다.

  "그럼 재택근무해라. 그래도 아주 안 보면 남 되니까 일주일에 한두 번 나올 수 없겠나?"

  "한 번 정도는 가능할 것 같아요."

  "그래. 그렇게 해."

  뭐지? 이렇게 쉽게 재택근무를 하라고 한다고? 얼떨결에 퇴사가 아닌 주 4회 재택, 1회 사무실 출근으로 결정됐다. 마음이 편해진 사장님은, 내는 일 안 해도 밥 먹고 사는데 지장 없지만 할 수 있을 때까지는 하려고 애쓰고 있다, 사람 바뀌는 거 정말 싫으니까 니 그냥 이 동네로 이사 와라 등등 아버지 하소연 같은 말들을 쏟아내고는 전화를 끊으셨다.


  나, 낚인 걸까?


  아니다. 사실, 사직서를 내기 전에 어느 정도 예상했던 그림이다. 누가 먼저 재택근무 이야기를 꺼내느냐의 문제였다. 내가 먼저 재택근무를 요청하게 되면 출근 일수라든가, 급여면에서 회사의 요구를 따라야 하는 상황이 된다. 내가 퇴사를 했을 때 아쉬운 건 회사라고 생각했다. 대부분 이런 계산은 틀린 경우가 많았지만, 이번엔 맞았나 보다.


  우리 회사 분위기는 사무실 출근이 필수였기에 코로나 시국에도 재택근무는 없었다. 집에서 일하는 대신 쥐꼬리만 한 월급을 깎거나 일주일에 두세 번은 나오라고 할 것 같았다. 그렇게는 계속 일하고 싶지 않았기에 바로 사직서를 낸 거였다. 주 1회 출근이면 해볼 만하다. 사장님이 이렇게 쉽게 내 뜻대로 해 줄 거라고는 예상 못했다. 내가 그동안 그렇게나 일을 잘한 거야? 오예~


  여성인력개발센터에서 교육을 받고 보험회사에서 1년을 일하고 이 회사로 이직했다.  회사는 운송회사다. 사장님이 전에 보험영업을 했고 아직도 유지되고 있는 계약들이 있다. 나는 처음 2년간은 보험 계약을 관리하는 일만 했지만, 3년 전 운송 사무 업무를 하던 직원이 그만둔 뒤 그 업무까지 병행해서 하고 있다. 일의 양은 적은 편이지만 종류가 폭넓어 후임자 구하기가 쉽지 않은 조건이다.


  퇴사 결정은 사흘 만에 재택근무로 변경됐다. 이 결정에 기분이 좋은 걸 보면 나는 아직 자유롭게 글만 쓰고 싶은 마음보다는 다달이 들어오는 월급이 더 절실한 것 같다. 어쨌거나 월급도 챙기고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시간도 주 4회 챙기게 됐다. 아침마다 막내딸 머리를 예쁘게 빗어주고 교문 앞에서 손도 흔들어주고 하교 시간에 맞춰 간식을 만들어놓고 기다릴 생각에 기분이 하늘을 난다.




  사직서를 쓰면서 브런치북 하나를 기획했다. 제목은 <나를 찾기 위해 입사했다가 나로 살기 위해 퇴사했어요>. 전업주부로 살다가 재취업해서 겪은 일들과 워킹맘의 고민, 퇴사 후 새로운 삶에 대해 쓰고 싶었다. 그런데 사장님이 시원하게 재택근무를 하라고 하는 바람에 퇴사 후 새로운 삶에 대한 이야기는 쓸 수 없게 됐다. 하지만 이건 취소가 아니고 보류다. 오늘 붙잡았던 사람도 내일 이득이 안된다 생각하면 버리는 게 회사다.  역시 내가 그리고픈 그림이 이게 아니다 싶으면 언제든 다시 그릴 생각이다. 도화지는 얼마든지 있다.



P.S. 제 퇴사 결정을 응원하고 격려해 주신 분들께 부끄럽습니다. 제가 나약한 갈대 같은 존재라는 게 들통났네요. 너그러운 마음으로 재택근무 결정도 응원해 주실 거죠?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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