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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아람 Jun 01. 2023

도둑이 금붙이와 함께 훔쳐간 것


  주말 저녁에 아버님을 만났다. 원래는 밥만 먹고 헤어지는데 그날은 차도 마셨다. 집에 돌아와 도어록 비밀번호를 눌렀는데 '띠리릭~'이 아닌 '삑삑삑-' 소리가 나며 열리지 않았다. 몇 번을 해봐도 안돼 문에 붙어있는 스티커를 보고 열쇠수리점에 전화를 걸었다.


  잠시 후에 수리 기사가 왔다.

  "이거 고장 난 게 아니에요. 안에서 잠갔어요. 도둑 든 거 같은데... 도어록 떼내야 열 수 있어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도어록을 뜯어내고 안으로 들어갔다. 어두운 집 안은 고요했다. 남편이 안방으로 들어가고 내가 뒤따라 갔다. 헉- 옷장 서랍이 모두 열려 있다. 도둑 들었다...!


  경찰에 신고했더니 강력계라고 쓰인 조끼를 입은 분들이 왔다. 내가 굉장히 큰일을 당한 느낌이 들었다. 드라마에서 처럼 지문 채취를 한다고 여기저기 붓칠을 했다. 없어진 게 뭐냐고 물었다.

  "금이요. 결혼 물이랑 아이 돌반지 등등 엄청 많이요."

  난 결혼 전에 가지고 있던 금으로 된 액세서리와 결혼 때 예물로 산 진주, 다이아, 순금 세트, 첫아이 돌 때 들어온 금반지, 팔찌를 화장대 안에 잘 모셔두고 있었다. 도둑놈 가져가기 편하시라고...


  우리 집은 2층이었다. 도둑은 베란다 방법창 한 칸을 뜯고 들어왔다. 아파트 단지 중 가장 안쪽이라 인적이 드물고 그쪽엔 CCTV도 없었다. 나는 늘 빨래에서 냄새가 날까 봐 베란다 창문을 반쯤 열어뒀다. 방범창이 뜯길 거라고는 의심하지 않았다.


  이사를 한 달 앞두고 있었다. 아버님이 우리한테 주신다고 한 집이었는데 형님의 사업 부도로 팔게 됐다. 서른두 평 아파트에서 열다섯 평짜리 낡은 빌라로 이사가게 된 것도 짜증 나 죽겠는데, 그런 날 약 올리듯 도둑이 들었다.


  내가 보기에 경찰은 도둑을 잡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한번 쓱 보고는 흔적도 없고 가져간 것도 금뿐이라 추적이 불가능하다며, 이런 놈 잡기 힘들다고 단정 지어 말했다. 노력해 보겠다는 말 한마디쯤 해 줄 수도 있잖아. 나는 만삭의 몸으로 울면서 밤을 꼴딱 새웠는데 남편은 그깟 금붙이쯤 없어져도 괜찮다며 얄밉게 쿨쿨 잘 잤다.


  한 달 뒤에 이사한 집은 외벽이 빨간 벽돌인 오래된 주택으로 열쇠로 문을 열어야 했다. 낡고 귀중품 하나 없는 집에 도둑이 들어올 리 없다 생각해 문도, 창문도 대충 닫아두고 살았는데 아버님이 말씀하셨다.

  "아무리 가난해도 도둑이 훔쳐갈 건 있는 법이야."

  

  하루는 첫째를 어린이집에 보내려는데 열쇠가 없었다. 남편에게 전화했더니 본인이 두 개 다 가지고 있단다. 문을 잠그지 않고 곤히 자는 둘째(신생아)를 놔둔 채로 첫째를 데려다주고 왔다. 집 앞에서 보니 문이 살짝 열려있었다. 심장이 쿵쾅 거렸다. 또 도둑이 든 걸까? 둘째가 집안에 있으니 망설일 틈 없이 집안으로 들어갔다. 아무도 안 보여 얼른 둘째가 자는 방으로 들어갔다.


  "어머니~"

  어머니가 잠든 둘째 옆에서 수건을 개고 계셨다. 왜, 시어머니들은 그렇게 연락도 없이 불쑥 찾아오는 걸까? 남대문시장 가다가 들렀다는데 우리 집이 남대문시장 가는 길에 있는 것도 아니고... 금방 일어서는 어머니를 잡지 않았다. 점심 드시고 가시라고 할까 했지만 말이 되어 나오지는 않았다.


  어머니가 가시고 생각해 보니, 우리 집에 훔쳐갈 게 있었다. 우리 집에 몰래 들어오는 나쁜 놈들이 꼭 물건만을 가져가라는 법은 없다. 이렇게 허술한 빌라 문을 따고 몰래 숨어있다가 나쁜 짓을 하고 생명을 앗아간 사건을 뉴스에서 본 기억이 있다. 아버님 말씀대로 훔쳐갈 게 없는 집은 없다. 그깟 금붙이 잃어버린 것쯤 아무것도 아니다, 그건 내게 앞으로 일어날 나쁜 일을 액땜한 거라고 마음먹기로 했다.



  마음을 그렇게 먹기로 했지만... 그깟 금붙이 값이 엄청나게 치솟으니 속이 쓰렸다. 아이들을 태우고 고속도로를 달리던 늙은 우리 차의 브레이크가 말을 안 들어 앞차를 박은 날, 심장판막교체술을 받는 어머니께 수술 말고 보험적용 안 되는 몇 천만 원짜리 시술로 하시라고 시원하게 말하지 못한 날에 나는 그깟 금붙이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도둑놈이 가져간 금붙이 중에는 남편이 호주에서 알바로 번 첫 번째 돈으로 사준 작은 오팔이 달린 14k 목걸이가 있다. 나랑 너무 잘 어울려 특별한 날에 꼭 했던 귀걸이도 있고, 회사에서 최우수 사원으로 뽑혀 받은 반지도 있다. 도둑놈은 그깟 금붙이뿐 아니라 내 추억도 훔쳐갔다. 놈이 아닐 수도 있는데 자꾸 놈이라고 해서 미안.




  오늘, 오래전 도둑맞은 일이 생각난 이유는 대학로에서 <늘근도둑 이야기>라는 연극을 보고 와서다. 감옥에서 만난 두 늙은 도둑이 마지막 노후대비(?)로 한탕하러 갔다가 실패하고 잡히는 내용인데, 정치와 시사 풍자로 100분 내내 쉴 틈 없이 웃고 뭔가 해야 했다.(관객들에게 계속 뭘 시킨다) 이 연극은 시간 도둑이다. 세상에 이렇게 사랑스러운 도둑만 있으면 좋으련만.


박철민 배우는 이 연극을 22년간 했다고 한다. 입에 모터 단 줄 알았다.


  오랜만에 반지를 끼고 출근했다. 도둑 맞고 몇 해가 지났을 때, 결혼반지 하나 없는 게 마음 쓰인다며 남편이 사준 반지다. 다이아몬드 비슷한 큐빅이 박힌 심플한 디자인이다. 늘 끼고 다녔는데 막내딸을 낳고 아이 얼굴에 상처라도 낼까 빼둔 이후로 잊고 지냈다.


  나는 액세서리 착용이 불편하고 좀 귀찮다. 그런데 결혼할 때 왜 그리 많은 귀금속을 샀던 걸까? 나 이만큼 해주는 집에 시집간다고, 내 가치가 이만큼이라고 자랑하고 싶었다. 남들의 눈이 중요했던 나는 누군가 몰래 집어가 버리면 사라질 것들에 가치를 두고 있었다. 도둑맞은 금붙이가 생각나면 아직도 속이 쓰리지만, 그깟 금붙이가 내 가치를 증명한다고 믿었던 어리석은 마음도 함께 도둑맞은 것 같아 조금은 위안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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