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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아람 Jun 26. 2023

비 오는 날 고민 끝에 선택한 신발의 배신


  비 오는 날 아침, 출근을 하려고 현관 앞에 서서 한참을 고민했다. '뭐 신고 나가지?' 예전의 나라면 어차피 젖을 거라며 샌들을 신고 나가 물웅덩이 따위 겁내지 않고 걸었을 것이다. 요즘의 나는 더러운 빗물에 발이 젖는 게 싫다. 그렇다고 장화는 너무 답답한 느낌이라 별로고 내가 요즘 신는 운동화는 매쉬소재라서 금방 빗물이 스며들고 발에서 꼬랑내가 날 텐데... 아, 구두를 신자! 신발장 안에서 오랫동안 세상 구경을 못한 굽이 낮은 로퍼를 꺼냈다.


  신발을 고른 뒤, 우산을 꺼내 들었다. 내게는 대가 살짝 녹슬어가는 오래된 하늘색 우산이 있다. 예전에 퇴근시간에 갑자기 비가 내렸던 날, 직장 동료가 쓰라고 준 우산이다. 누군가 두고 갔는데 주인이 누군지도 모른다며 나더러 쓰고 가라고 했다. 그날부터 나는 출근할 때 비가 오면 이 우산을 쓰고, 퇴근할 때 비가 안 오면 사무실에 두었다가 비가 오는 날 쓰고 집으로 가기를 반복했다. 가끔 어떤 하찮은 물건에 정이 갈 때가 있는데 내게 이 우산이 그렇다. 비 오는 출퇴근길을 오랫동안 함께 한 친구 같은 느낌이랄까.




  집을 나와 주차장 입구에서 하늘색 우산을 펼쳐 들었다. 오랜만에 구두를 신은 발걸음이 가볍다. 물웅덩이를 피해 가며 조심조심 지하철역을 향해 5분쯤 걸었을 때 발뒤꿈치가 따끔거리기 시작했다. 작년에는 분명 편안했던 사이였는데... 오랜만에 내 발뒤꿈치와 만난 구두는 뭐가 삐졌는지 틱틱거렸고 결국 더 힘이 센 구두 가죽이 내 발뒤꿈치 가죽을 벗겨냈다. 믿었던 신발에 배신당했다. '아, 쓰라려...' 전철에서 내려 사무실을 향해 걸을 때는 살짝 절뚝거리며 10여분을 걸었다. 빨리 사무실로 들어가 구두를 벗고 밴드를 붙여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아침에 신발을 선택하는 이 작은 일조차도 내 예상과는 다른 결말을 만들어낸다. 고로 무슨 선택을 할 때 이것저것 재면서 고민 길게 할 필요 없다는 교훈을 얻었다. 내일도 비가 내린다는데 내일은 발이 젖든 말든 편하게 걸을 수 있는 샌들을 신어야지. 더러워진 발은 씻으면 그만이지만 상처 난 발은 씻을 때도 고통스럽다. 그나저나 퇴근 길이 걱정이다. 발뒤꿈치에 붙인 밴드가 끝까지 잘 붙어있어야 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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