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라이따이한(베트남전에 참전했던 한국군과 베트남 여자 사이에서 태어난 2세)입니다. 어릴 때 아이들이 저한테 돌을 던졌어요. 그래도 저는 운이 좋았습니다. 어머니가 저를 키웠으니까요."
6월에 갔던 베트남 다낭 여행. 침향을 파는 쇼핑센터 대표라는 사람이 자신을 '라이따이한'이라 소개했다. 그는 1968년생이고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한국군이 아버지라 했다.
베트남전이 끝나고 전쟁에 참전한 군인과 노무자들은 현지에서 만난 여자와 그 사이에 태어난 아이들을 베트남에 남겨두고 돌아갔다. 그 아이들은 베트남에서 라이따이한이라 불리며 멸시와 괴롭힘을 당했고, 많은 아이들이 고아원으로 보내지고 고무농장으로 보내져 괴롭게 살았다고 한다.
다낭에서 불과 차로 30분 정도면 갈 수 있는 거리에 하미마을이 있다. 하미마을은 1968년 베트남전에 참전한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로 인해 몰살당한 마을이라고 가이드가 버스 안에서 말했다... 이때부터 내 머릿속은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베트남 여행에서 돌아와 베트남전 당시 민간인 학살에 관한 책을 도서관에서 빌려왔다. 책에 실린 사진을 잠깐 보고는 2주 동안 책을 펼치지 못했다. 여자, 노인, 어린아이 가리지 않고 잔인하게 학살을 한 광기 어린 군인... 그들은 나라의 발전을 위해 목숨을 걸고 타국으로 건너가 싸운 영웅이고, 그로 인해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고통받는 안타까운 분들이라고만 알고 있었는데... 그게 같은 사람이라면? 나는 어떤 결론을 내릴 수 있을까?
반납할 날짜를 한번 더 연장하고서야 책을 읽기 시작했고, 미국이 베트남을 침공한 역사적 배경과 우리나라가 참전한 정치적 이유를 알게 됐다. 베트남전에 참전한 군인들이 그렇게까지 광기에 사로잡히게 된 배경에 우리가 일제강점기에 받은 핍박과 이념의 대립, 빨갱이는 무조건 죽여야 한다는 무서운 사상, 그건 전쟁 같은 극한의 상황이 아님에도 국내에서 저질러진 사건들과도 연관이 있음을 알게 됐다.
베트남전의 전후로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제주도 4.3 사건과 5.18 광주 민주화운동에서 허용된 광기. 일본의 사과를 받지 못하고 베트남에 사과하지 않는 나라. 몇십만의 유골 위에 세워진 거대한 탐욕의 탑...
난 여기서 생각을 멈췄다. 외면하고 싶었다.
한 달 뒤에 중3딸의 책상 위에 책 한 권이 놓여있었다.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를 가볍게 펼쳤다가 무겁게 덮었다. 1980년 광주에서 살았던 소년과 그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 너무 마음이 아파 울었다. 그때 희생된 수많은 영혼들이 아직도 어딘가를 떠도는 듯한 느낌이다.
작가의 마음을 생각했다. 1980년 광주 이야기를 이렇게 섬세한 필체로 쓸 수 있는 작가라니. 그녀는 마치 자신이 그들의 영혼이 되어 독자에게 전해주듯 글을 썼기에 글을 쓰는 내내 그 아픔을 고스란히 겪었을 것 같았다. 그런데 그다음 읽은 책에 그 마음이 나와있었다.
<작별하지 않는다> 이 작품 초반에 나온 주인공의 상태가 그녀의 상태였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렇게 힘든 마음을 견뎌내고 제주도 4.3 사건 희생자와 생존자의 아픔을 이야기하는 작품을 써낸 그녀가 존경스럽다.
아무 생각 없이 제주도 여행을 몇 번 다녀왔다. 내가 다녀간 제주 공항 활주로 아래서 죽어간 사람들과 아름답다고 감탄하며 거닐던 바닷가에서 피 흘리며 죽어간 아이들이 있다는 걸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 부끄럽다.
그녀의 글은 내내 어둡지만 마지막에 이제 어둠에 묻혀있지 말고 환한 곳으로 나와도 된다,라는 메시지가 들리는 듯했다. <소년이 온다>에서 엄마한테 그늘 말고 햇빛이 있는 쪽으로 걷자는 아들, <작별하지 않는다>에서 어둠 속에서 성냥을 찾아 불을 켜는 주인공. 어두운 역사가 집어삼킨 사람들이 있다는 걸 기억하고 마음속에 촛불 하나씩 밝히길 바라는 작가의 마음이라고 나는 해석했다.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는 동안 나는 계속 꿈을 꿨다. 작품에 나오는 모래사장에, 눈밭에 서 있거나 거기 서서 글을 썼다. 그리고 작품 속의 주인공처럼 속이 좋지 않았다. 책을 읽으면서 어떤 작가를 만나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는데 한강 작가를 한번 만나보고 싶었다.
그녀의 동영상을 찾아보다가 YTN뉴스 인터뷰를 보게 됐다. 기자가 맨부커상을 받은 후의 계획 같은 걸 물은 것 같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언제나와 다름없이 저는 계속 혼자서 계속 글을 쓰게 될 거라는... 제 생각은 그래요. 제 마음은 그렇기 때문에 특별히 많은 것이 변할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아요."
한 번 더 그녀에게 반했다. 그녀는 목소리가 조용하고 잠을 잘 못 잘 것 같은 얼굴이다. 보약이라도 한 상자 사서 보내드리고 싶은 마음이다. 글을 써야 할 사람은 따로 있는 게 아닐까, 나는 읽는 사람으로 남아야 하는 건 아닐까 생각하면서 이 글을 썼다.
베트남 여행을 갔던 6월부터 한강 작가의 책을 읽기까지 두 달 정도를 사람이 사람한테 할 수 있는 잔혹한 폭력에 대해 생각했다. 작가의 서랍에 오래 있던, 결론 내리지 못한 글을 꺼내놓는 이유는 기억하기 위해서다. 종교, 이념, 부와 권력 그 어떤 가치도 생명에 우선할 수는 없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힘없는 사람들을 향한 폭력이 멈춰지는 날이 오기를 기도한다.